아래는 본인이 일반인을 위해 계획하던 자유주의 경제학 입문서의 원고이다. 나는 경제학에 문외한이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좌파들과 사상적 투쟁을 하다 보니 어쩌다 경제학까지 오게 되었다. 나의 본래 생각은 자유주의 경제 사상가들의 경제 사상이나 이론을 여기저기에서 끌어와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 봄부터 초여름까지 글을 써서 아래의 원고를 마련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완성은커녕 언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 원고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후일을 기약해 본다.
가짜 경제학을 격파한다
<인간의 시작>
침팬지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어 나온 것은 5백만 년 전이다. 그리고 2백5십 만년 전에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가 나타났고, 20만 년 전에는 해부학적 현대 인간이 나타났다. 다시 10만 년 전에는 해부학적 현대인이 인간의 표준이 되었다. 그리고 한스 헤르만 호퍼에 따르면, 5만년 전에 이르러, 해부학적인 현대인이 “행위적인 현대인”으로 진화했다. 여기서 호퍼가 말하는 행위적인 현대인은 수렵-채취인을 가리킨다. 5만년 전에 인류의 도구를 만드는 재료들은 단순히 나무와 돌을 넘어, 뼈, 사슴 뿔, 상아, 동물의 이빨, 조개 껍데기, 그리고 먼 지방에서 가져온 재료들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도구들은 칼과 바늘, 낚시 바늘, 핀(pin)과 날(blade), 송곳(borer) 등이었다. 또 장신구, 조그만 인형, 새의 뼈로 만든 피리 등 악기들도 나타났다.
현대 인간들은 유목민적인 생활을 하는 수렵-채취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10 ~ 30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형성하며 다녔고, 때로 이들 집단이 합쳐져서 150 ~ 500 명에 이르는 집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집단은 보편적으로 평등주의적이었다. (Hans-Hermann Hoppe의 책 <A Short History of Man> 참조)
30여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은 분명 지도자가 있어서, 그의 지도 아래 집단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조직이었을 것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그런 소규모 집단에서 동료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했던 것은 연대(連帶)의식과 이타주의의 본능이었다. 그런 집단에서 고립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홉스가 말했던 원시인의 개인주의란 거짓말이다. 원시인들은 고독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능은 집합적이었다. 하이에크는 당시의 집합적 본능이 우리에게 남아서, 오늘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으로 표출된다고 보고 있다.
30여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은 집합주의적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한 명의 족장이 집단 전체의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집단 전체가 움직이는 체제였고, 족장에 의해 구성원 전체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평등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하이에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만인은 자유롭지 못했고, 그가 속한 집단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개인의 결정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전제로 하므로, 단지 사유재산의 진화가 있은 다음에야 가능하다. 사유재산의 진화로 인해 확장된 질서의 초석이 놓였고, 이로써 족장이나 집단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허구는 프랑스의 루소가 만들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 그는 이런 용어를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원초적인 인간은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고, 야만인들은 야만스럽지 않고 그보다는 고상하다는 주장이 들어 있었다.
좌파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소규모 집단은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운 고상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의 토지는 일정한 생산량 밖에 없었고,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므로, 이들 집단은 생존을 위해 서로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을 것이다. 호퍼(H. H. Hoppe)는 그들 집단은 증가하는 인구 때문에, 상호간의 투쟁 외에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 또는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조직을 채용하거나 만들어내야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고상한 야만인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칼 마르크스의 글에도 나타나는데, 특히 엥겔스에게 두드러진다. 그는 인간 사회는 원래 여성들이 이끌었고, 거기에는 질투가 없었고, 자유 연애가 성행했다고 믿었다.
그는 <기원, Origins,1894> 제4판에서, 위와 같은 사회의 완벽한 예는 호주의 아보리진 원주민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Helen Gardner의 글 <Explainer: the myth of the Noble Savage>)
또 하이에크에 따르면, 현재의 규모로 인류가 발전한 것은, 서서히 진화한 인간 행동의 규범들 덕분이다. 인간행동의 규범들이란 사유재산권, 정직, 계약, 교환, 무역, 경쟁, 소득, 사생활의 권리 등이다. 이들 규범은 본능이 아닌 전통, 교육, 모방을 통해 전수되었고, 대부분은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기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통제 국가에 의해 통치되는 거대 사회는 물론이고, 인간들은 계약, 화폐, 또는 비인간적 규범 등의 시장 질서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소규모 집단이나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족 집단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의 두뇌는 약 150 여명의 사람들과 안정된 사회 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인간은 진화에 의해 집단의 한 성원이 되도록 만들어졌는데, 그 집단의 크기는 매우 작다. 이들 집단은 다양한 구조를 갖지만, 기본 양식은 일반적으로 동일하다. 거물이나 다른 형태의 대장 또는 ‘알파’가 있게 마련이다..... 가장 기본적 의미에서, 이들 집단은 일반적으로 자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다. 당시의 유전적 프로그램은 명확하게 나보다 우리를 강조했다. 우리는 아직 그 프로그램에 매달리고 있는데, 그것이 근대성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Jonah Goldberg의 책 <Suicide of the West: How the Rebirth of Tribalism, Populism, Nationalism, and Identity Politics is Destroying American Democracy>의 구절. Marian L. Tupy의 글 <Explaining Our Miraculous Flourishing>에서 재인용)
<프시케의 임무>
제임스 프레이저는 그의 책 <프시케의 임무, Psyche's Task>라는 책에서, 특정 종족 그리고 특정 진화 단계에 몇몇 사회적 제도들은 부분적으로 미신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회적 제도들은 군주제 정부, 사유재산, 결혼, 인간의 생명 4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위의 책에 따르면 미신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가장 명확한 예는 폴리네시아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서는 어떤 사물에 터부를 지정하게 되면, 거기에 주술적,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게 되어서, 주인 외에는 누구도 그 사물을 건드리는 못한다. 이로써 미신이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마오리족과 오래 생활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터부는 사유재산의 보호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고, 족장은 물론 전사(戰士)와 소(小) 족장, 신사(gentleman) 등까지도 터부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 터부가 미치는 범위는 동산(動産), 무기, 옷, 장신구, 그리고 그들이 만지는 모든 물건까지 이른다. 터부로 지정된 물건은 타인들이 훔쳐가지 못하고, 또 함부로 움직이거나 다루어지지 않는다, 터부를 위반하는 사람은 신(神)에 의해 갖가지 벌을 받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는 치명적인 병에 걸리는 것이다. 또 사람들에게 발각될 경우, 위반자는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는 재산을 빼앗기거나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그런 사회에서 누군가 자신의 작물이나 집, 옷, 기타 등등을 지키고 싶다면, 거기에 터부를 걸면 되고, 그걸 알리기 위해 거기에 특정한 표시를 하면 된다. 그래서 누군가 만일 특정 나무로 카누를 만들고 싶다면, 그는 그 나무 둘레에 풀을 엮어 둘러놓으면 된다. 또 습지에 자란 부들의 줄기들을 이용하고 싶다면, 그 안에 꼭대기에 풀을 두른 장대를 꽂아놓으면 된다. 귀중품이 있는 집을 두고 나갈 때는, 문을 아마풀의 줄기로 묶어놓으면 된다.
이렇듯 법이 없는 사회에서 터부는 법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일종의 규범으로 작용했고, 사회의 안정에 기여했다. 따라서 단순히 터부를 미신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이에 대해 하이에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신은 잘못된 동기를 제공해서 올바른 행동을 유도했다. 잘못된 동기로 인간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의도로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 사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지 그들의 의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이 선하고 정의롭다면, 그들의 의견이 어떠하건 타인들에게는 상관이 없다.” (The Fatal Conceit, 인터넷 PDF판 157쪽)
프레이저의 책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도 도둑들에 대한 저주를 납으로 만든 서판에 새겨서 신전에 두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경계석(境界石)을 옮겨 타인의 땅을 몰래 침범하지 못하도록, 경계석을 제우스 신의 가호 아래 두었고, 로마인들은 아예 경계석을 지키는 신을 따로 만들었다. 신명기(Deuteronomy)는 이웃의 경계석을 움직인 행위에 대해 엄중한 저주를 담고 있다. 따라서 고대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역사적으로 일정한 시기에 미신이 법률을 대신해서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신은 성 도덕의 보존에도 기여했다. 다시 프레이저의 책에 따르면, 버마의 카렌스 족에서는, 간통이나 음란은 작물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이 있다. 따라서 1, 2년 작황이 좋지 않거나 비가 잘 오지 않을 경우, 그들은 비밀리에 간통이 일어났으며, 땅과 하늘의 신이 이에 분노했다고 판단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공물을 바치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노력한다.
또 만일 간통 사건이 발각되었을 경우, 마을 원로들의 결정에 따라 사건 당사자들은 돼지를 사서 죽여야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각각 돼지의 다리를 하나씩 갖는다. 그리고 그 다리로 땅에 고랑을 판 뒤에, 거기에 돼지 피를 채운다. 그리고 그들은 두 손으로 땅을 파며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늘과 땅의 신이여, 산과 언덕의 신이여, 저희들이 땅의 생산력을 훼손했습니다. 저에 대한 분노를 거두어주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고 저를 동정해주십시오. 이제 저는 산과 언덕과 냇물과 땅을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이제 작물들이 잘 자라도록 해주시고,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재난을 저 멀리 쫓아내고, 논을 풍성하게 해주십시오. 비록 우리의 작물이 보잘 것 없어도,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이제는 땅의 기운을 회복했다고 말한다.
또 벵갈의 라자마할 지역 주민들은 비밀리에 행해진 간통은 마을에 역병을 몰고 오거나, 호랑이의 화(禍)을 입게 한다고 믿는다. 이를 방지하려면 간통한 여자가 이를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 남자는 돼지를 사서 피를 내고, 두 사람이 그 피를 몸에 발라야 한다. 그럼으로써 죄를 씻어내고 신들의 노여움을 피할 수가 있다.
수마트라 서쪽에 있는 니아스(Nias)섬의 원주민들은 폭우(暴雨)가 내리면 그것은 간통을 보고 슬퍼하는 신의 눈물이라고 믿는다. 죄악에 대한 벌은 죽음으로, 간통 남녀는 얼굴만 남기고 무덤에 묻힌다. 이어서 칼로 그들의 목을 베고, 그들은 묻히게 된다. 또는 산 채로 묻히기도 한다. 하지만 죄에 합당한 대가를 주고 죽음을 면제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들 미신은 열대의 원시 부족에만 있지 않고, 고대 유태인들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이 간통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작물이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간통이 농작물을 망친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뜻이다. 또 그리스에서는 외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와 잠자리를 한 이후로, 역병과 흉작이 나라를 덮쳤다. 그리고 미신을 넘어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간통 남녀를 목을 졸라 죽이고 강에 던져버리도록 했다.
또 간통만이 아니라, 근친상간이나 가까운 친인척 사이에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들과 어머니, 딸과 아버지, 형제와 자매들, 사위와 장모 등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 역시 성적인 문란으로 인한 결혼제도의 붕괴를 예방하는 효과를 지닌다.
고대인들의 미신은 근거가 없고 소위 말하는 과학적이지도 않지만, 이렇듯 사회의 결혼 제도를 유지하고 전통과 관습을 지속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과학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비난하거나 매도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회에 미치는 역할에 더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프레이저는 귀신이나 유령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런 비과학적인 미신이 생명의 유지와 향유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살해된 사람의 유령이 살인자를 따라붙으며 복수한다고 믿었다. 또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인 경우라도, 그 사람은 나라를 떠나 1년 동안 외국을 떠돌아야 하고, 희생물을 바치고, 정화 의식을 행한 뒤에야 돌아올 수가 있었다.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가 어머니 유령에 쫓겨 여러 나라를 방랑했다는 전설도 역시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나아가 살인자 자신 역시 마을이나 공동체 사람들에 의해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아키쿠유족은 살인자가 마을에 들어와 가족과 식사를 하면, 그와 같이 식사를 한 사람들은 치명적인 감염이 되고, 적시에 주술사에 의해 치료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스에서 살인자의 정화 의식은 새끼 돼지를 죽여 그 피로 살인자의 손을 닦는 것이었다. 또는 피가 아니라 월계수 잎사귀로 정화 의식을 하기도 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역사의 어느 단계에는 미신이라 불리는 터부가 인류의 사유재산과 결혼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에도 가끔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예를 들어, 과거 신문을 보면, 살인범이 범행을 저지르고 난 뒤에, 피살자의 유령에 시달리다 수년 후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가 자수를 했다는 보도를 볼 수 있다. 이는 사자(死者)의 유령이 존재한다는 미신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아직 터부가 현대에도 작용하고 있고,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터부를 단순히 비과학적이라는 말로 배격해버린다면, 인간들은 아마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터부는 역사상 어느 단계에 나타난 뒤에, 문명이 발전하면서 차차 도덕이나 법률에 흡수되어 갔는데, 한편으로는 종교가 나타나 자체의 독특한 신앙체계에 터부와 도덕, 법률 등을 모두 통합하기도 했다. 그래서 종교는 때로 시장경제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종교가 사유재산이나 결혼제도 등을 옹호하고 보호하면서, 시장경제가 발전한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종교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종교의 주장은 과학적 시비의 대상이 아니고, 일종의 상징이나 비유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최근에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나심 탈레브 역시, 종교의 관습은 시간의 시험을 거치면서 수많은 세대에 걸친 지혜를 통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 종교는 또 희귀하고 어려운 상황들을 헤쳐 왔는데, 이러한 종교적 관습을 채용한 사람들 역시 이들 관습 덕분에 생존해왔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종교가 개인적으로 또 집합적으로 강력한 위기 관리 기능을 했으며, 시스템에서 부채의 누적을 예방했고, 자연에 대해 불가역적인 오류가 될 수도 있는 실험을 방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종교만의 방식으로 위기 관리의 휴리스틱(heuristic, 대처 요령, 삶의 단순한 지침)을 세대를 거쳐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Rupert Read and Nassim Nicholas Taleb의 논문, <Religion, Heuristics, and Intergenerational Risk Management> 참고)
그는 또 과학적인 사실들은 이러한 희귀하고 위험한 사건들을 포함할 만큼 과거 시간으로 회귀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에 비해 근본적으로 열세라고 말한다.
또 종교 규범은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채용하기 위해 합리성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고, 또한 종교가 초자연적인 주장을 하기 때문에, 종교의 규범이 더욱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Sergio Graziosi의 글 <R. Read and N.N. Taleb advocate religion as a risk-management system: I am not convinced.> 참고)
인간은 포유동물의 일종이고 진화를 통해 오늘날의 위치에 도달했다. 그런데 진화의 가장 큰 목적은 생존이다. 종교는 인류의 역사 초기에, 인간들이 침묵하는 세계와 광대무변의 우주를 대하고 느꼈던 무지와 공포에 단순한 생존의 방식을 전해줌으로써, 인간이 살아가고 나아가 번영하는 방식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비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와 전통을 배격한다면, 인간들은 생존의 단순한 요령(휴리스틱)을 잃게 될 것이고, 그것은 다시 인간의 생존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여기서 잠깐 결혼이나 사유재산의 탄생에 대해 생각해보자. 다른 포유동물을 관찰해보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보편적이 아니고, 본능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냥 남자가 이웃한 소집단의 여자를 찾아가 성교를 하고 다시 자신의 집단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방식으로도, 후손을 이어가고 또 성적 본능을 충족시킬 수도 있다. 세계의 저개발 지역에 가면, 아직도 이런 결혼 형태를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명국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확립하고 있다. 결혼은 분명 본능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부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정해서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리를 할 수 있다. 역사의 어느 단계에 일부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발견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성적인 만족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구성해서 생존에 더 유리해 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아니 결혼이라는 제도를 채용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더 번영하고 확장되어나갔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결혼을 채용한 집단의 번영 ----> 결혼을 채용한 집단의 확산 --->다른 집단에서도 결혼이라는 제도를 채용하기 시작함 --->결혼이 보편적인 제도가 됨>이라는 과정을 밟아, 결혼이 제도로서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사유재산도 같은 추리를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 30여 명 규모의 소집단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 소유였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사유재산도 없었고, 족장이나 전체의 의사를 거스르는 개인주의적인 행동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조그만 전체주의 사회였다. 하지만 이런 소규모 집단이 다른 집단과 접촉하고 물건을 교환하고, 생각을 교환하면서, 차차 사유재산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소규모 집단 내에 분업이 나타나 장인들이 전문적으로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돌도끼, 자신의 활, 자신의 칼 등이 나타났고, 사유재산이 확립되면 그것이 점점 발전한다는 신기한 사실도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터부를 통해 사유재산은 타인이 건드리거나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나타났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 그것은 도덕으로 또는 법률로 정착되었다. 물론 이때로 사유재산제를 채용한 집단이 먼저 나타나고, 그 집단이 번영하면서 다른 집단이 그들을 따라가는 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결혼이나 사유재산은 본능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제도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문화는 본능과 인위적인 구성물 사이에 끼어 있으며, 자생적으로 탄생했다고 말했다. 이런 문화에는 결혼과 사유재산만이 아니라, 언어, 법, 화폐, 시장 등도 포함한다.
언어나 법, 화폐, 시장 역시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본능에 따라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들이 모여서 이제부터 언어, 법, 화폐, 시장을 만들자고 합의를 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의사를 소통했고, 그것이 차차 확대되면서 언어가 나타났다. 화폐 역시 정부가 제도를 만들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조개껍질이나 동물가죽 등 귀한 물건을 화폐처럼 사용하면서, 화폐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18세기 스코틀랜드의 학자 아담 퍼거슨은 “모든 사회구조는 인간 행동의 결과이지만,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결과는 아니다.(social structures of all kinds were “the result of human action, but not the execution of any human design.)”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간들이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의사를 소통하다 보니(행동을 하다 보니) 그것이 언어가 되고, 또는 법이 되고, 화폐가 되고, 시장이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인간의 제도가 인간들의 계획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행동의 결과로 나타났고, 돌이나 세포나 인간 사회처럼 모든 구조는 자생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현대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근대 이후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과학으로 또는 과학적 방법으로 인간의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 글 좀 읽은 사람들 사이에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시장을 비롯해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를 흔히 사회공학적 사고 방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방금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결혼이나 사유재산, 시장 등의 제도는 몇몇 개인이 고민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인류의 생각과 행동과 시행착오가 들어가 있다. 정부의 관료 몇 명이 고민해서 이런 제도를 대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 문화는 인간의 여러 본능들, 성적 충동이나 타인의 물건에 대한 욕심 등을 제어하고 억제하면서, 인간 사회를 유지해 왔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가 인간의 성욕을 억제하고 그로 인해 노이로제가 발생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매우 위험한 효과를 현대 사회에 남겨 놓았다. 즉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억제하지 말고 이를 배설하고 방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슴이 말하는 대로 따르라는 말이다. 이에 따라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는 전통은 배격과 파괴의 대상이 되고 만다. 터부나 전통, 관습 등은 사실 정확한 과학적 근거도 없다. 우리가 그것들을 존중하고 준수해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터부와 전통과 관습이 파괴되면, 인간들은 터부와 전통 등에 의해 유지되어 온 질서를 같이 파괴하게 되어서, 엄청난 혼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재 그 혼란의 한 가운데 있고, 현대의 신좌파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전통의 파괴이다.
더 나아가기 전에 잠깐 “놀이”의 기능에 대해 알아보자.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의 형성에 이르는 관습들은 놀이를 할 때에 지켜지는 규칙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찍이 “놀이”를 연구한 호이징가(또는 하위징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문명 생활의 본능적 세력들은 신화와 의식에 기원한다: 법, 질서, 상업, 수익, 기술, 예술, 시, 지혜, 과학. 이들 모든 것은 원초적 놀이의 토양에 뿌리 박고 있다. 놀이는 질서를 창조하고, 질서 자체이기도 하다. 자체의 시공간 속에서 고정된 규범에 따라, 그리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놀이가 진행된다." (하이에크, 치명적인 자만, 인터넷 PDF 154쪽에서 재인용)
하이에크는 놀이가, 각자 나름의 그리고 때로 갈등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요소들에 의해 공통의 규칙이 지켜질 때, 그 과정이 전반적으로 질서를 찾는 분명한 사례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백만이 서로 서비스와 상품을 교환하는 시장경제는 놀이에 그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동아프리카의 좁은 땅에서 서로 반복하고 싸우던 인간들은, 드디어 좁은 땅을 벗어나 밖으로 밖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인간의 이민 행렬은 기원전 5만년부터 12,000 ~ 11,000년 동안에 일어났다. 이 기간 동안 지구의 기온이 점차 떨어졌고, 이에 따라 해수면도 점점 낮아졌다. 홍해의 슬픔의 문(Gates of Grief, Bab al Mandab)에서 아라비아 반도로 건너간 인간들은 계속 동진했다. 여행은 주로 배와 도보로 이루어졌고, 해안선을 끼고 배로 이동하다, 강이 나타나면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인도까지 가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갈래는 동남아시아로 나아가 인도네시아와 사훌((Sahul)대륙( 호주, 뉴기니, 태즈마니아를 포함하는 대륙)으로 향했고, 이어서 섬들을 건너뛰어서 중국과 일본으로 나아갔다.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가서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 유럽으로, 또 시베리아 남부로 나아갔다.
이어서 14,000 ~ 12,000년 사이에 시베리아 남부에서 다시 베링 해협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가 약 천 년 후에 파타고니아에 이르렀다. (위의 호퍼의 책, A Short History of Man 참고)
이렇게 지구의 곳곳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마련한 인간들은 문명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곳은 정체했으며, 어떤 곳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여기서 잠깐 인간의 진화와 관련해, 인간의 문화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하버드 대학의 리차드 랭엄(Richard Wrangham)은 그의 책 <불의 발견: 요리는 어떻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나(Catching Fire: How Cooking Made Us Human)>란 책에서,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식품을 불로 조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소화 기관의 길이가 줄어들고, 치아와 턱은 축소되었고, 뇌의 용량이 커졌으며, 그로 인해 18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즉 요리와 불의 사용이라는 문화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인간의 문화와 유전자가 공진화(共進化, coevolve)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로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에 비해 유년기가 상당히 길어졌는데, 이 동안 아이들은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체득하게 된다. 그 전통은 다시 후대로 전해져 사회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도덕의 중요성>
앞에서 문화가 본능과 인위(人爲) 또는 인공(人工)의 중간에 있는 실체라고 했는데, 도덕 또한 그렇다. 하이에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화론적 도덕론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은 본능이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본능과 이성의 중간에 있는 또 다른 전통에서 생겨났다. 도덕적 전통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이성과 함께 발전해왔다. 또 놀랍게도 도덕은 이성의 능력을 뛰어넘는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 방식의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이성이 도덕보다 우수하다고 믿고 있지만, 하이에크는 그와 반대로 도덕이 이성의 능력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오래 전에 데이비드 흄은 "도덕 규범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다."라고 천명했다.
그 이유는 도덕이 언어와 보통법(관습법)처럼 완만한 진화의 산물이고, 평화와 질서, 사회적 협동이라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헨리 해즐릿, The Foundations of Morality, 인터넷 PDF판 9쪽)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듯이, 과학과 과학적 합리주의 사고가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사회 전반에 퍼져나가면서, 종교와 도덕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통해 말했듯이,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거짓말과 기만, 폭력과 살인 등의 수단을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사회의 종교와 도덕을 공격하고 배격하는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또 법과 도덕에서는 보편 규범의 원칙(general rule principle)이 있어서, 모든 경우에 하나의 규범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고 한다면, 내가 유리할 때는 거짓말을 하고, 보통 상황에서는 정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일률적으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거짓과 진실을 이야기 할 때, 그런 사람과는 상대를 할 수가 없고, 그런 사회는 점차 붕괴된다는 경험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이를 처음으로 천명한 사람은 데이비드 흄이고, 이어서 아담 스미스도 그의 <도덕론>에서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이 신성한 보편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행동은 신뢰할 수가 없다. 원칙과 명예의 인간과 쓸모없는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쓸모 없는 인간은 기분과 충동과 이해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우발적으로 행동한다. (정의, 진실, 순결, 충실) 등의 의무를 준수하는데 인간 사회의 생존이 걸려 있고, 이들 행동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위의 책 57쪽에서 재인용)
사회(공산)주의자들에게 전통 도덕은 낡아빠진 헌신짝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 되지만, 수 백만, 수 천만의 시민을 죽이면 스탈린이나 모택동, 김일성과 폴 포트에게는 한탄 통계숫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이에크에 따르면, 이런 공산주의 도덕은 근대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그리고 공리주의 등에 의해 배태되었다. 합리주의는 경험과 추론(reasoning)에 의해 얻어진 지식만을 신용했고, 경험주의는 경험에 근거한 지식만이 참다운 지식이라고 믿었으며, 실증주의는 모든 참된 지식은 과학적이라고 선언했고, 공리주의는 행동의 정당성 여부는 그것에 의해 사람들에게 유발된 쾌락과 고통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경험하고 관찰하고 측정될 수 있고, 쾌락을 주는 것만이 진실이고 가치가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부정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문화를 창조해온 전통 도덕은 그런 방식으로 정당화 될 수 없으므로, 보존할 가치가 없으며, 우리의 임무는 과학적 지식에 바탕해 새로운 도덕을 건설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치명적 자만>에서 “사회주의의 목적은 전통 도덕의 완전한 개편에 있다.”고 단언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종교는 단지 대중의 아편이라는 천박한 딱지를 받고 탄압받았다. 사회주의자들은 구체적 사례에서 그것을 준수했을 때의 긍정적 효과가 인지되었을 때에만, 규범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는 도덕적 계율이 구체적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나타낼지 알 수 없으므로, 도덕률은 불변이며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거짓말 하지 말라’의 경우, 좌파들은 거짓말을 했을 때 그 결과가 긍정적이면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는 식이다. 하지만 하이에크에 따르면 우리가 거짓말을 했을 때,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무조건 그런 계율을 지켜야 한다.
흄에 따르면 행위는 그 공리(功利, utility), 즉 그 결과나 행복과 복지를 증진하는 경향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지만, 개별적인 행위에 대해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행동 규범에 대해 판단한다. 우리는 개별적인 행동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귀결될지는 모르지만, 도덕 규범들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사회에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의 깡패를 의협심 강한 주민이 법적 절차 없이 죽였을 때, 그의 행동으로 인해 마을에 악당이 제거되었지만, 그는 보편적인 도덕 규범인 ‘살인을 하지 말라’는 규범을 어겼기 때문에 그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데이빗 흄은 도덕의 보편성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이다. 그는 자비로운 자산가의 재산이 수전노 아들에게 상속되었을 때, 일시적으로는 그것이 사회에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사유재산권을 확고히 함으로서, 사회에 안정을 가져오고 정의를 세우게 된다고 역설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살인을 하지 말라.’ 등의 보편적인 도덕이 만일 통하지 않으면, 도덕규범이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바뀌고 예측할 수 없다면, 그래서 개인들이 자신들의 해석에 따라 마음대로 도덕을 왜곡하면, 그 사회는 거짓말쟁이와 도둑, 살인자들이 넘치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는 쇠퇴하고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덕률의 보편성, 불변성은 사회를 지키는 보루와 같은 것이다. 그런 도덕률들이 대개의 경우 기독교의 10계명처럼 종교의 계율로 전승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인류가 진화하면서 체득한 생존의 계율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우리 사회는 혼란과 쇠락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악인이 벌을 받고, 선인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은 촌스런 전통적 믿음이지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사회는 유지될 수가 없다.
전통 도덕을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예를 들어, 똑똑한(?) 기러기 한 마리가 가을에 떼를 지어 이동하려는데, 이동의 합리성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자신은 가지 않고 남아 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기러기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지혜를 불신한 결과, 그곳에 남아 겨울을 맞게 되고 얼어 죽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은 도덕률도 그와 유사하다. 그것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체득한 생존의 윤리들이기 때문이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일찍이 자신의 소설 <죄와 벌>에서 좌파 윤리관을 대표하는 인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창조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구두쇠인 전당포 노파를 죽여 그 돈을 가치 있게 쓰면, 살인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좌파적 사고 방식이다.
<죄와 벌>은 불변의 도덕률-살인을 하지 말라,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등이 무너지고, 그것이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대체되었을 때, 얼마나 큰 재난과 혼란이 뒤따를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좌파들은 전통 도덕을 버리고, 자신의 얄팍한 이성으로 시비를 가리고, 소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실존적’으로 결단하려 한다. 이런 좌파 인간들은 사람을 죽이고, 남의 재물을 빼앗으며, 질투와 증오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인민 대중’을 위해 한 일이기 때문에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좌파들이 정권을 잡으면 지상에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좌파들이 인류 문명의 파괴자들이고, 또한 인류 전체의 공적(公敵)임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위의 글은 본인의 미출간 책 <들어라 좌파들아, 이것이 우파의 반론이다>의 글을 일부 수정해 재록한 것이다.)
<물물 교환의 등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좁은 땅에서 생존경쟁을 하던 인간들은 점점 새로운 땅을 찾아 밖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좁은 땅에서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더라도, 이전에 자신들이 살던 지역에서 받던 문명의 혜택(?)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부싯돌이나 활을 만드는 줄, 접착제 등을 만드는 전문가들이 이전의 땅에 살고 있다면, 새로운 땅의 개척자들은 그들을 찾아가 그 물건들을 구입해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개척자들은 그들이 잡은 동물의 고기나 채집한 열매 등을 들고 이전의 촌락으로 찾아가 자신들이 원하던 부싯돌 등과 교환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 반복되고, 또 후대에까지 계속된다면 그것은 물물 교환이라는 형태로 발전했을 것이다. 하이에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고고학 성과에 따르면, 물물교환(무역)은 농업이나 기타 생산보다도 오래되었다. 유럽에서는 이미 3만년 전 신석기 시대에 장거리에 걸친 무역이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다. 8천년전 아나톨리아의 카탈 후육과 팔레스타인의 여리고는 흑해와 홍해 사이의 무역 거래의 중심지였다. 이들 도시에서는 인구의 놀랄만한 증가가 나타났다.”
하이에크가 지적했듯이 이미 3만년 전에 장거리 무역이 있었고, 이들 무역 거래의 중심지는 인구가 놀랄 만큼 증가했다. 소규모 집단에서 대장장이나, 옷을 만드는 장인, 활을 만드는 장인 등이 나타나면서 분업이 시작되었는데, 아마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분업은 어느 한계 내에서 더욱 촉진되었을 것이다. 분업으로 생산력이 증가하면 인구가 증가하고, 이는 다시 분업을 촉발하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1991년 이탈리아 령 알프스 산 기슭에서 후에 외치(Ötzi)라 명명된 냉동 인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5300년 경의 이 원시인이 들고 있던 구리 도끼의 구리가 이탈리아 남부 토스카니 지역에서 왔을 거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Long-distance connections in the Copper Age: New evidence from the Alpine Iceman’s copper axe. Gilberto Artioli ,Ivana Angelini, Günther Kaufmann, Caterina Canovaro, Gregorio Dal Sasso, Igor Maria Villa) 외치가 발견된 알프스 지역과 토스카니 지역은 약 555km나 떨어져 있으므로, 학자들은 구리 도끼가 장거리 무역의 증거라고 추측한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대의 무역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당시의 기록이 전무한 상태라 누구도 그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고,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고고학적 증거로 추측만을 할 뿐이다.
하이에크는 더 나아가 그리스의 역사에 나타난 무역을 묘사했다.
“호메르스가 읊은 <오딧세이아>에 보면 아테나는 구리와 교환하기 위해 철을 싣고 다니는 배의 선장으로 변장해 나타나는데, 이로써 호머 시대의 무역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후에 고전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무역의 거대한 팽창은, 역사적 문서 자료가 없지만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기원전 750 ~ 550년에 일어났다. 무역의 팽창은 또한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무역 중심지에 빠른 인구 증가를 동반했다.”
“그리스의 무역업자들은 기름이나 포도주가 담긴 도자기를 싣고, 흑해나 이집트, 시칠리아 섬의 곡식과 교환하러 다녔는데, 그들 도시 사람들 몰래 그들도 탐낼 만한 물건들을 같이 싣고 떠났다. 소규모 집단의 사람들도 이를 용인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럼으로써 소규모 집단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새로운 기술적 단계인 청동기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업자, 광부, 무역업자, 중개인, 배와 카라반의 조직, 양보, 계약, 이방인의 개념, 먼 지방의 관습 등이 모두 필요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타나는 아카이아 족과 트로이 성의 10년간의 싸움은, 서사시 속에서는 미녀 헬렌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사실 트로이 성의 독점적인 무역을 탈취하기 위한 전쟁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트로이가 흑해 연안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곳의 나라들과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아카이아 족, 다시 말해 그리스의 여러 부족이 연합해 트로이 성을 함락하고 무역로를 획득한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무역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하이에크가 지적했듯이, 무역은 단지 무역업자와 항해사들만 있는 게 아니라, 협상을 하려면 양보와 계약, 이방인에 대한 이해와 먼 지방의 관습 등이 모두 필요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혁신과 기업, 은행, 선진화 된 상업적 관행, 자유 시장 등은 현재의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이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등지에서 발견된 점토판을 해독한 결과, 그것들이 경제 거래에 쓰인 영수증이란 것을 알았다. 그를 통해 사적인 수익을 노리는 상인들, 세련된 투자 벤처, 시장 가격의 조정 등이 당시 일반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 2,500년전 바빌로니아의 천문 관측 기록에 따르면, 시장 가격이 매 달마다, 또는 매 주마다 바뀌었다.
네덜란드 사학자인 반더스펙과 만다마커스(Robartus Johannes van der Spek, Kees Mandamakers)에 따르면, “바빌로니아의 경제에서 시장 메커니즘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의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들 나라의 시장 경제 덕분에 중동 지역에서는 경제적 번영이 넘쳤지만, 이와 반대로 중앙의 계획과 통제에 매달린 이집트의 경제는 정체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전기를 쓰기도 했던 크세노폰은, 당시 고대 페르시아의 시장 관행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경제가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고 한다.
그는 또 키로스 대왕이 왕자 시절 시장의 거래에 대해 배웠다고 썼는데, 그에 따라 통치자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통치자의 임무는 사유재산권과 자발적인 거래라는 원칙 아래 거래가 이루어졌는지 살피기만 하면 끝이라는 말이다. 키로스 대왕은 노예들을 해방하고, 당시의 인권선언이라 할 만한 글을 쓰고, 표준 금화를 보급했으며, 왕도(王道)를 닦았는데, 이 길은 후에 비단길의 시초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7세기 경 관자(管子)가 나타나 시장 경제의 기틀을 놓았고, 또 당시의 상인들의 활동은 시장 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기원전 100년 경에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익 추구가 부를 창출하는 원동력이라고 천명했다. (위의 글은 Nima Sanandaji의 글 <시장은 문명만큼 오래되었다(Markets Are as Old as Civilization)>를 참고했음)
<반감의 원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장거리에 걸친 무역이 발달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앉아서 일을 하는 직업이 발전하고 전문화가 나타났다. 이어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고, 인구의 증가는 다시 전문화와 분업이 가속화 되었다. 이런 연쇄 반응으로 다시 인구가 증가하고 일인당 소득이 증가하면 다시 인구가 증가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인구의 증가는 과거 경제적 성장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하지만 고대의 상업의 발전은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상업은 상품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럼으로써 이익을 얻는 활동이다. 노동은 분명 사람의 눈에 보이고, 노동의 결과가 후에 나타나므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장인이 의자나 침대를 만들면, 그것은 노동의 결과 만들어진 상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교역은 단지 상품을 이동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이에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교역에서 단지 손을 몇 번 거친 후에 참가지 모두에게 이득이 되고, 또 한쪽은 손해 보고 한쪽은 이익을 보는 그런 거래가 아니라는 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상업 행위에는 특별한 상황의 지식이 필요하고, 이런 지식은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또는 특별한 상황의 지식은 새로운 상품이 성공할 것 같다는 육감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런데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이런 비밀스런 지식들은 그들의 불신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사람들이 상행위에 대해 지니는 반감의 바탕에 있다.
역사적으로 상인들은 경멸과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부정직한 사람이었다.
고대에 장사꾼들과 대장장이 등은 마을과 따로 격리되어 살았다. 대장장이는 "마술"로 물질을 변형시키고, 장사꾼은 상품의 가치를 변형시킨다고 믿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상업과 장사꾼들은 경멸과 반감의 대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일정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역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매우 생산적인 활동이 되는 이유는, 그로 인해 가치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가치에 대해 하이에크는 이렇게 말했다.
“교환과 교역에서 핵심적인 가치의 증가는 우리의 감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양의 증가와 다른 것이다. 가치의 증가는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치란 사물이나 행동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상이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다양한 개인들에 대해 가진 각각의 (한계) 대체 비율의 상호 교환을 통해서만 가치가 발현된다. 가치란 사물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그 사물의 더 나은 사용법이나 더 나은 사용 기회에 관련해서만 발현된다.
가치의 증가는 인간의 의도와 관련해서만 나타난다. 가치란 칼 멩거가 말했듯이, "경제적 인간이 그들의 삶과 복리를 유지해 나가면서, 그들 소유의 상품의 중요성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다. 경제적 가치란 다양한 인간의 목적이라는 척도를 만족시키는 사물의 변화하는 능력의 정도를 나타낸다.“
가치는 인간의 의도와 관련해서만 나타나고, 인간들이 그들의 상품의 중요성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므로, 먼 곳의 상품이 상인들의 손을 거쳐 내 앞에 왔을 때, 본인이 그걸 원한다면 그 상품은 그가 생각하는 가치만큼 가격이 오르게 된다. 상인은 가치가 적은 곳에서 가치가 높은 곳으로 상품을 이동시키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사람인 것이다.
또 상업 행위에는 특별한 상황의 지식이 필요하고, 이런 지식은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또는 특별한 상황의 지식은 새로운 상품이 성공할 것 같다는 육감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만일 요식업을 하고 싶다면 그 방면의 다양한 지식과 비결이 있다. 하지만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걸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티비에 보면 흔히 며느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 비법이라는 게 나오는데, 바로 그런 종류의 지식들이다. 또 지금 어떤 사업을 하면 성공할 것 같다는 느낌 같은 것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사업가들은 이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고대에 상인들의 이런 지식은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불신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상행위에 대해 지니는 반감의 원인이 되었다. .
하지만 상인들에 대한 반감의 원인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이에크는 이를 ‘지식’의 요소로 보았다.
“상인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긴 또 하나의 요인은 신체적 노력과 근력을 사용하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신체적 노동에는 신비스러운 게 하나도 없으므로, 사람들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원시시대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내려온 본능이기도 했다.
원시인들도 신체적 경쟁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지식'이 경쟁의 요소에 개입되자, 또 구성원 다수에게 소유가 불가능한 지식이 개입되자, 공정성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은 연대의식과 합의된 목적의 추구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었다.
칼라일은 노동만이 고귀하다고 했고, 칼 막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노동이 진정한 부의 원천이었다.“
고대에 아직 공동체가 공통의 목적을 추구하고, 연대의식이 아직 강렬히 남아 있던 시기에, 상인들이 나타나 자기만 아는 지식을 활용해 장사를 시작했다면,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성한 ‘노동’에 종사하며 땀을 흘리는데, 상인들만 멀리서 싸게 사온 물건을 힘들이지 않고 비싸게 팔아먹는다면, 당연히 이를 적대시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하이에크는 시장의 기능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시장은 사물(상품)을 생산하기보다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하지만 기계론적 또는 과학적 습관을 지닌 사람들의 눈에 정보의 전달이라는 기능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에 대한 사실적 정보는 당연히 여기지만, 다양한 사물의 상대적 결핍에 의한 가치의 결정이라는 역할은 무시한다.”
위의 노동만이 고귀하고 진정한 부의 원천이라는 칼라일이나 마르크스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좌파들의 신념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상업 행위는 엄연히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이다. 농업보다 오래 전에 고대 부족들 간에 물물교환이 있어왔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런 자명한 사실은 1870년 경 소위 한계 (효용) 혁명이 일어나서야 이론적으로 분명해졌다. 또 시장이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은 고대인으로서는 매우 생소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인과 시장을 배척하고 질시했다.
<인식의 한계>
당시 인식의 한계는 상업을 위축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다. 대중이 갖고 있던 상업에 대한 반감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반영되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급자족 경제를 이상으로 삼았는데, 이에 대해 하이에크는 그를 비판하며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경제학자라고 불리지만, 그가 논한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기껏해야 가정 경제나 농장과 같은 개인 사업이었다. 그가 크레마티스티카(chrematistika)라 부른 시장에 대해 그는 단지 경멸을 퍼부었다. 당시 아테네인은 장거리 무역을 통한 곡물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그의 이상은 자급자족 경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종류의 진화에도 반대했다. 그는 성장의 과정을 기술하는 '자연'의 의미에 무지했고, 자생적으로 성장한 코스모스(kosmos)와 군대와 같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질서 탁시스(taxis)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 행동의 모든 질서는 탁시스 즉 권위자에 의해 개인들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조직한 결과이었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동의 모든 질서는 권위자, 즉 정부 권력에 의해 개인들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로 보았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결혼제도, 화폐, 언어, 법률, 시장 등 인간 사회에 질서를 만든 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개인들의 행동의 결과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화’가 본능과 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차원의 산물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원인은 그가 모든 종류의 진화에 반대했고, 성장의 과정을 기술하는 ‘자연’의 의미를 아직 몰랐기 때문이다.
(멩거는 화폐가 개인들의 사익 추구 행위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어떤 천재가 생각해 낸 것도, 그렇다고 정부의 지시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먼 옛날 물물교환 시대에, 물건(상품)들은 각기 다른 판매 가능성(saleability)이 있었다. 예를 들면 식량인 밀은 판매 가능성이 높아서, 시장에 가져나가기만 하면, 곧장 그것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하지만 꽃병을 가져나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따라서 꽃병을 가진 사람이 만일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할 때, 하지만 꽃병을 곧장 물고기와 교환할 수 없을 때, 그는 일단 ‘판매 가능성’이 더 큰 물건과 교환을 한다. 그래서 돌도끼를 가진 사람이 꽃병을 갖고 싶어 하면, 먼저 돌도끼와 교환한다. 그리고 다시 돌도끼를 조개껍질과 교환했다가, 마침내 그 조개껍질을 물고기와 교환하면 물고기를 먹을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원하는 물건이 차차 드러난다. 예를 들어, 조개껍질만 가지면 누구와도 거래를 할 수 있고, 어떤 물건이라도 교환할 수 있다면, 조개껍질이 사람들에게 화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화폐가 태어났다는 게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장이다.)
나아가 하이에크는 당시 아테네 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을 따랐다면, 그들의 도시는 촌락으로 전락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철학은 그후 2천 년 동안 서구의 철학적, 종교적 사고를 지배했다고 비판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사회의 질서는 전령(傳令)의 목소리가 미치는 경계까지만 허용된다고 믿었고, 또 10만 명이 넘는 국가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가 그 글을 쓰고 있을 때, 이미 10만이 넘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현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백면서생이었다. 하지만 이런 엉터리 논리가 서구 사회를 2천년 동안 지배했으니, 그 폐해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꿈꾸는 인구 10만 미만의 자급자족 경제는 알고 보면 바로 현대의 좌파 환경주의자들의 이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이미 1000만 명이 사는 대도시이다. 천만명이 사는 도시를 굳이 10만명의 자급자족 도시로 만든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머지 990만 명이 굶어죽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국가라는 장애>
국가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은 국가의 출현으로 제도가 갖춰졌고, 법률이 만들어지고 안전이 보장되었다고 믿는다. 나아가 그들은 국가의 개입으로 인해 상업이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자생적인 질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국가는 오히려 사람들의 이러한 자생적 질서를 방해하고 차단한 독점적 권력이라는 사실에 눈 뜨게 된다. 그래서 하이에크는 이렇게 지적했다.
“경제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고도로 조직된 국가가 초기의 문명 발전의 극성기를 이루어냈다는 믿음이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개인의 자생적 노력이 이뤄낸 것보다는 국가가 한 일을 더 많이 알고 있는 탓에, 우리의 역사 서술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크게 과장된다.”
우리가 국가의 역할을 크게 보는 이유는 단지 그에 대한 지식이 월등하게 많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자생적으로 만들어낸 시장이나 상업 활동은 역사적 기록이나 흔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국가에 대한 기록은 넘쳐난다. 당연히 역사의 긍정적인 면을 국가의 역할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고대에만 하더라도, 특히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직 국가가 소규모였고, 관료들도 소수여서, 아직 상업 활동에 크게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가 기구가 비대해지고, 관료들이 증가하고, 국가를 질서의 유일한 담당자로 알게 되면서, 사람들의 상업 활동은 크게 제약을 받게 된다.
현대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마 국가가 가장 깊숙이 개인들의 경제 행위에 개입하고 간섭한 국가 형태일 것이다. 고대 국가의 상행위에 대한 간섭과 방해는 주로 세금으로 또는 권력자의 횡포로 나타났다. 그리고 현대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예 인간의 경제 행위 자체를 국가가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과학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주의가 파산한 뒤에, 같이 망해야 했던 좌파들은 하지만 또 다시 변신을 해서 이번에는 복지국가라는 이념으로 변형된 사회주의를 등장시켰다.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빼앗고 시장을 말살했던 이전의 사회주의와 달리, 복지국가는 부의 재분배와 규제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 역시 완만하지만 끝내는 경제적 파산을 피할 수 없는 가면을 쓴 사회주의일 뿐이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박탈한 예는 중국의 한 고사가 잘 보여준다. 예기 단궁(禮記・檀弓)에 나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也)라는 고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공자가 제(齊)나라에 가서 태산을 지날 때, 어떤 여인이 묘 앞에서 곡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자로(子路)를 시켜 이유를 묻게 한즉, 여인이 이렇게 답했다.
“오래전에 시아버지가 호랑이에 물려 죽었는데, 이후에 남편마저 같은 화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들마저 같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에 자로가 다시 물었다.
“호랑이가 그렇게 무서운데 부인은 왜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이에 부인이 대답했다.
“여기에는 가혹한 정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자로가 돌아와 공자에게 보고하자, 공자가 말했다.
“자네들은 기억하게, 가정(苛政)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을”
이 고사는 당시 국가의 관료들이 백성들을 괴롭혔고, 이에 백성들이 관료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나 호랑이가 출몰하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고대에 싹이 트려던 문명은 국가의 개입과 횡포로 다시 위축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스파르타>
외부 세계와 물물교환을 하면서 공동체에 갇혀 있던 개인들은 차차 소규모 집단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규모 집단은 개인들에게 공통의 목적을 추구하고, 또 집합주의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무역이나 교환은 집합적 지식이 아닌 개별적인 지식에서만 가능하다. 개인들이 자신만이 아는 지식을 이용해 외부 세계로 나아가 그들과 협상하게 되므로, 점차 개인주의가 싹트고 사유재산이 나타나고, 개인의 창의성이 활약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을 옭아매었던 소규모 집단의 연대의식과 집합주의는 차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개인들이 끊임없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그물망이 점차 확산되면 세계를 덮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경제적 질서는 확장되어 갔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이유들로 인해, 상업은 질시를 받고 제약을 받으면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또 스파르타처럼 아예 처음부터 소규모 공동체의 질서를 국민 모두에게 강요한 국가도 나타났다. 하이에크는 스파르타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상업적 혁명을 가장 강력히 저항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고, 절도를 허용하거나 장려했다. 그들은 문명을 거부한 야만인의 표본인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와서 벌써 스파르타 시대로 회귀하려는 열망이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권력자에 의해 감독되는 마이크로 질서(micro-order)에 대한 열망이다.”
아래는 플르타르코스가 스파르타에 대해 쓴 글의 일부인데, 리커르거스라는 사람이 스파르타 인들을 교묘히 통제해서, 그들이 지도자에 열광하고, 국가주의적 이상에 도취해서 사회주의, 나아가 전체주의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커르거스(Lycurgus)는 시민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살려는 소망도 그리고 그런 능력도 갖지 못하도록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보다 그들은 벌들처럼 자신을 전체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도록 하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열광과 숭고한 이상에 정신이 나가, 모두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하지만 숭고한 이상에 도취되어 시작한 스파르타의 사회주의는 곧 모순을 드러내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경제적, 도덕적 파산에 이르자, 하이에크가 지적했듯이, 국가에서 도둑질과 약탈을 장려하기에 이른다.
플라톤의 <공화국>이 스파르타를 모델로 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파르타는 상업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 전지전능한 권력자에 의해 관리되는 소규모 질서에 대한 갈망 등이 결합되어 탄생한 국가이다. 하지만 인간이 왜 이전의 원시적 형태의 삶을 희구하는지는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어쩌면 인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충동을 동시가 갖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통찰이 옳을 수도 있다. 인간은 원시적 소규모 생활에 대한 회귀 욕구와 확장된 질서(extended order)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갖고 있고, 개인의 지식과 성향, 상황에 따라 그중 한 가지를 추종하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죽어야 했다>
여기에서 잠깐 소크라테스와 그의 죽음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소크라테스가 옳은 소리를 하다 아테네 시민들의 미움을 샀고, 그래서 결국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독배를 마셨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나심 탈레브는 그의 책 <앤티프래질>에서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대(大) 카토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大카토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관습을 파괴하고 시민들에게 법과 질서에 반하는 견해를 주입시켜, 나라의 폭군이 되려 한, 말 잘하는 재주꾼이었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기존의 관습과 법과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이를 조롱하고 반발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크게 어지럽히자, 이에 위협을 느낀 아테네 시민들이 그를 사형에 처했다는 주장이다. 앞에서 터부나 전통에 대해 말했지만, 터부나 전통은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가 따라야만 한다. 거기에는 수 백, 수 천년 동안 인간들이 행동하고 생활하면서 터득한, 생존의 비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말로 이해하려 하고 비판하고 조롱한다면, 똑똑한 것처럼 보여도, 알고 보면 헛똑똑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터부와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탈레브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응답하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I want to live happily in a world I don’t understand.” ― Nassim Nicholas Taleb, Antifragile: Things That Gain From Disorder)
(오래 전에 미국 방송에서 <60분>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직장에서의 경력을 추구하던 여성들이 40이 넘어 결혼을 하고 막상 임신을 하려고 하니, 나이가 너무 많아 임신이 잘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소개했다. 적정 결혼 연령은 사회마다, 시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30살 전에는 시집을 가야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중론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내 방식대로 삶을 추구하다보면, 나중에는 불임이라는 결과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관습과 전통은 이렇듯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를 따라야만 우리의 생존과 후손의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
더구나 플라톤의 <공화국>의 화자(話者)는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이 스승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발표했다는 게 중론이지만, 어쩌면 레닌과 스탈린의 관계처럼, 정말로 소크라테스는 매우 위험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 소크라테스가 있었다면, 고대 중국엔 공자가 있었다. 정치에 관한 한 공자도 소크라테스와 같이 현인정치를 꿈꾸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대척점에 있던 사람이 바로 노자이다. 노자는 그의 <도덕경> 첫 구절에, “말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고, 우리가 사물에 붙이는 이름은 상명(常名)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공자로 대표되는 합리주의를 반박하는 선언이다. 하지만 노자는 그후로 산속으로 사라져서 자연인이 되었고, 중국의 정치는 유가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장자에는 포정해우(庖丁解牛) 이야기가 나온다. 소를 잡는 백정이 그의 능란한 기술로 소를 해체해서, 소를 잡은 후에도 칼날을 갈 필요가 없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다. 이야기 속에서 백정과 대화를 나눈 문혜군(文惠君)은 그에게서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고 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백정의 소 해체의 지식과 기술은 하이에크가 말한 소위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다. 암묵적 지식은 공자 류의 합리적이고, 명시적 지식에 비해 세상을 움직이는 진짜 지식이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에서 노자나 장자의 암묵적 지식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道)는 경시되고, 소위 성현의 말씀이라는 명시적 지식이 세상을 지배해 왔다.)
드소토(Jesús Huerta de Soto)가 쓴 <고대 그리스의 경제 사상(Economic Thought in Ancient Greece), 출처: Mises.org.>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업가적 수익, 근면 또는 시장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지적으로 반대하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호 연설을 보면, 배심원 앞에선 그는 거만했고 거짓된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행사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무역과 장인업(匠人業) 그리고 시장 등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매일 땀 흘리는 정직한 부모들의 삶의 현장을 비웃음으로써 청소년들을 끌어 모았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삶의 목표는 ‘덕’에 있는데, 이는 물질적 부(富)를 경멸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업가적 수익이다. 소크라테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가난을 자랑했고, 당시 아테네와 상반되는 이상을 대표하는 전체주의 국가 스파르타의 알려진 ‘덕’을 이상화 했다....
더욱 위험한 일은, 소크라테스의 국가 우상화(statolatry)이 너무 집요해서, 그가 도시국가에서 유래한 실정법(positive law)과 자연법(natural law)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더라도(contra naturam) 국가에서 유래한 모든 실정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런 법률 실증주의(legal positivism)는 후에 나타난 모든 폭군들이 기대는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한 마디로 시장 과정의 과학적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의 영향은 분명 파괴적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반자본주의적 지적 전통을 시작했고 또 널리 전파했다. 그는 자생적인 시장 질서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는데, 그 시장 질서 덕분에 아테네가 번영했고, 나아가 소크라테스와 그의 학파에 속하는 기타 철학자들은 노동하지 않고 단지 사색을 즐기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대적인 자유와 번영이라는 환경을 제공한 대가로,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경멸과 오해만을 받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소크라테스를 너무 과대 평가했는지 모른다. 건실한 시민들의 관습과 삶, 기업가적 수익을 비웃은 그는, 지금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다시 사형대에 세워야 할 인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소크라테스를 잘못 알아 왔다. 그는 마르크스의 선구자였다.
<언어의 문제>
탈레브는 행위 속에 표현되는 인간의 지각과 직관이 우리가 언어로 알고, 체계화하고, 토론하는 것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예로 언어학자 도이처(Guy Deutscher)가 쓴 책 <언어의 거울(Through the Language Glass)>의 내용을 든다. 도이처에 따르면 원시 주민들은 색맹이 아니었지만, 색깔을 표현하는 언어가 두어 개 정도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험을 해보면 그들은 정확하게 색을 차이를 알고 답을 했다. 또 무지개의 색깔의 차이를 모두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행동하는 데에는 색깔의 차이를 모두 알고 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었고, 단지 문화적으로 색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은 언어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이후로 인간들은 언어를 더 숭상하고, 언어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 현인이나 통치자, 관료 등으로 세상을 다스렸고, 행동은 열등한 것으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행동으로 세상을 배운 일반 주민들보다 사실은 더 어리석었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의 정책이나 통치로 인한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탈레브 식으로 말하면,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이 없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를 주민들이 모두 감수해야 하는 생황이 반복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반란>
소크라테스와 유사하게 부모들이 만들어놓은 자유와 번영이라는 환경 속에서, 또 다시 반자본주의적 사고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경제 사학자인 맥클로스키(Deirdre N. McCloskey)는 그녀의 글 <대번영은 자본이 아닌 아이디어 위에 건설되었다(The Great Enrichment Was Built on Ideas, Not Capital)>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지식인들은 1848년 이후로 국가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반자유주의로 돌아섰다.,,, 18세기에 볼테르나 토마스 페인과 같은 지식인들은 무역의 자유와 부(富)의 추구 결과 나타나는 인간의 존엄을 용기 있게 변호했다. 하지만 1830, 40년대에, 대부분 부르주아 아버지를 둔 자식들이, 경제적 자유와 그들의 아버지가 열심히 누리고 있던 사회적 존엄을 비웃기 시작했다.”
이들이 유럽의 사회주의를 보급하고 전파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 역시, 1970년 이후로 부모들이 이뤄놓은 경제적 안정과 번영 속에서, 경제적 자유를 비웃고, 반자본주의적 사고를 한 젊은이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후에 소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한국 사회를 사회주의로 몰아왔다. 역사와 어리석음은 반복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 유능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는 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답을 즐겼다.
“신발이 닳으면 누구를 찾아갈 텐가?”
“신발 장인이요.”
“가구가 망가지면 누구를 찾아갈 텐가?”
“목수요.”
“낫이 망가지면 누구를 찾아갈 텐가?”
“대장장이요.”
“그럼 국가라는 배에 문제가 생기면 누구를 찾아갈 텐가?”
정답은 국가 경영을 잘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생각은 사실 현대까지도 내려오는 생각이다. 중국의 공자는 그런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불렀다. 현명한 지도자가 나서서 국가에 안정을 가져오고, 경제적 번영을 이룬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막상 누가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지, 그 자격은 무엇인지, 현인인지 누가 결정하는지 등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누구도 수 십 만, 또는 수백, 수 천만의 요구와 희망, 능력을 알아서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고, 그들의 능력을 100% 발휘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결혼제도, 사유재산, 화폐, 언어, 법률, 시장 등이 모두 특출 난 개인의 발명품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의도하지 않은 행동의 결과라는 사실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중앙의 권력자의 통치나 지시, 명령 없이도, 인간 사회가 운영될 수 있으며, 오히려 중앙의 통치자가 간섭하지 않을 때 이런 제도가 원활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2천년이 넘게 사람들을 속여 왔던 성인(聖人) 또는 현인(賢人) 통치의 우상이 깨지고 만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현인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인간 상호 간의 교류와 교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할 법과 법관들,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해주는 치안, 국가의 안전을 지켜주는 군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스 민주제>
우리는 고대 그리스가 민주제를 처음 시작한 나라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 민주제가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의 민주제는 추첨제로 디마르키(Demarchy)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여자와 노예를 제외한 자유인 모두를 대상으로 추첨을 해서, 법관이나 관리, 500인 회(會) 등 나라의 경영을 맡겼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첨으로 대표자를 뽑는 정치 형태를 민주제라 부르고, 선거를 통한 정치 형태는 과두제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두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는 정치 형태를 민주제라고 부르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의 국회의원을 투표로 뽑는 정치 형태는 민주제가 아니라 과두제 또는 일종의 귀족정치이다.
어쨌든 디마르키, 즉 추첨에 의한 정치 형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프랑스의 몽테스키외까지 보편적으로 민주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 베네치아 공화국과 17세기 영국에서는 추첨제가 실시되었고, 현대 스위스에서는 지금도 부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추첨제를 시행하면, 현재 소위 ‘민주제’라 불리는 제도의 각종 폐해가 일소될 수 있는데, 추첨제는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대중적 합법성이 제고된다.
*대표 기관이 독립성을 유지한다.
*부패가 없다.
*정당이 필요 없다.
*선거 비용과 정당 유지 비용이 크게 감소된다.
*과도한 법률, 규정, 규제 등이 없어진다.
*정부가 작아진다. (브라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Antony P. Mueller의 글 <Forget Electoral Democracy — Give "Demarchy" a Chance> 참고)
케이시(Gerard N. Casey)는 그의 책 <국가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적 무정부(Libertarian Anarchy Against the State)>에서 국회의원이 국민을 대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해가 서로 다른 수 천, 수 만 명의 주민들의 이해를 대표할 수 없으므로, 선거구를 대표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대의 정부라 불리는 것은 사실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정당들의 경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의민주제는 첫째 민주제가 아니고, 둘째로 대의제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제6장, Deligitimizing the State. <In What Way Are Political Representatives Representative?> 참고)
우리나라에는 끄떡하면 “민주”를 외치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정치 권력을 차지하고 그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모리배들이거나, 자신들의 극단적인 정치관을 보통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좌파 이데올로기 광신도들이다. 민주를 외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줘야 한다.
“좋은 말이다. 민주제를 하려면 그리스의 원본 민주제를 실시하자. 그리고 너희들 정치 모리배들과 이데올로기의 광신도들은 이제 퇴장하기 바란다!”
<로마의 멸망>
해스켈(H. J. Haskell )은 그의 책 <로마의 뉴딜정책(The New Deal in Old Rome)>에서 로마가 망한 것은 게르만 족의 침공이 아니라, 로마의 도덕적 경제적 타락이었고, 다시 그 근원은 정부의 인기영합주의와 개입주의라고 밝혔다.
책에 따르면 로마에서도 미국의 뉴딜과 유사한 대규모의 정부 개입이 있었는데,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빵과 서커스”였다. 빵과 서커스라는 정부 개입으로 인해 로마는 도덕적 무감각(amorality), 더 많은 개입, 더 많은 부패, 간헐적인 인플레이션, 마침내 전체주의 국가로 발전했다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미제스도 그의 책 <인간 행동>에서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놀라운 고대 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시장 경제의 요구에 도덕률과 법률 시스템을 적응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정상적인 기능이 요구하는 행동을 도덕 규범이 거부하고, 법률이 불법으로 판단하고, 법원과 경찰이 박해할 때, 사회 질서는 붕괴한다. 로마 제국은 자유주의 정신과 자유 기업의 결핍으로 망하고 만 것이다.”
앞에서 국가가 상업과 국민의 경제 활동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라고 했는데, 로마 제국의 멸망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해스켈은 책 후반부에 로마의 원로원 선거에 이기기 위해 후보자들이 남발했던 각종 정책을 열거했는데, 아래는 그중 몇 가지이다.
367 B.C.—Licinius Stolo가 서민들의 부채에 대해 지불유예 혜택을 줌.
357 B.C.—최고 금리를 81/3 퍼센트로 정함.
342 B.C.—채무자들을 위해 금리가 폐기되고, 법이 무시됨.
217 B.C.—카르타고와의 제2차 전쟁으로 재정이 긴축되자, 화폐의 평가절하가 도입됨.
133-121 B.C.—시장 가격보다 아래인 부셸(bushel) 당 32 센트(1939년 기준)로 정부가 서민들에게 밀을 판매함.
58 B.C.—밀을 무료로 배급함.
49-44 B.C.—율리우스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로마 시민들이 놀라 자본이 이탈하고 부동산 값이 폭락함. 이에 부채를 전쟁 이전의 가치에 준해 삭감했다. 또 8만 명을 구호 명단에서 제하고 로마 밖으로 이전시켰다. 상품의 사재기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고, 이탈리아 토지에 강제로 투자하도록 함. 또 도로, 공공 시설, 간척 사업 등을 담당하는 공공사업부를 신설함.
29-9 B.C.—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더 광범위한 공공 개발 사업을 벌임. 병사들의 보너스를 올리고, 이집트에서 가져온 약탈품과 정부 소유의 광산에서 채굴한 금과 은으로 화폐를 만들어 통화량을 증가시킴. 이로 인해 가격이 상승하자, 구호자 인원을 32만명에서 20만 명으로 줄임.
9 A.D.—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 시대에는 포도주의 과잉 생산을 막기 위해 지방 포도밭의 반을 파괴함.
97-106 A.D.—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시장 금리의 반으로 농부들에게 대출해줌. 빈민의 자녀들에게 정부 보조를 지원함. 원로원에는 그들 재산의 1/3을 이탈리아 토지에 투자하도록 함.
117-211 A.D.—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그 후계자들. 중앙 정부와 도시들이 공공 사업에 과도하게 지출함. 이어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 크게 지출을 하게 됨으로써, 정부 재원과 세금의 재원을 고갈시킴.
212-273 A.D.—중과세와 인플레이션으로 기업들이 혼란에 빠지고 중산층이 붕괴됨
27 A.D.—아우렐리우스 황제. 정부 구호(救護)가 확대되고, 밀 대신 빵을 나눠주었으며, 거기에 돼지고기, 올리브 기름, 소금 등이 무료 제공됨. 구호품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상속됨. 세금이 놀랄 만큼 오르고 인플레가 급등함.
284-476 A.D.—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 후계자들. 세금이 급등하고, 가격 폭등과 과평가 된 화폐로 인한 인플레.
301 A.D.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임금과 가격을 통제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칙령을 내림. 일종의 전체주의 국가가 됨. 하지만 이로 인해 농산물 생산이 붕괴하고, 게르만 족이 침입하면서, 수도를 이전하고 이로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함.
로마 정부의 개입과 부패는 인플레 상승과 함께 일어났다. 인플레의 상승은 당시 통용되던 데나리우스라는 은화의 은(銀) 함유량의 점진적인 감소로 나타났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만 해도 순수한 은화였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구리와 다름 없었다. (William H. Peterson의 글 <Governments Have Been Corrupt Since Before Christ> 참고)
벤 모렐이 지적했듯이, 한때 정부를 그들의 하인으로 부리던 로마 국민은, 점차 그들의 주권을 정부 관료들에게 떠맡겨서, 음식과 오락을 받는 조건으로 관료에게 절대 권력을 주고 말았다. 더구나 당시 타락으로 인해 국민들이 서서히 자살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자립적이고 용감하고 자주적인 개인들은 마침내 폭도가 되어, 그들의 삶을 정부의 원조에 기대게 되었다. (Ben Moreell의 글 < Of Bread And Circuses> 참고)
<다시 장애를 만난 상업과 자본>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자본주의나 상업과 친근하지 않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다. 그는 또 환전상들을 찾아가 책상을 엎으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공산주의적 삶을 추구했다. 기독교는 영적인 삶을 추구하므로, 물질적인 소유와 경제적 발전에 대해 본능적으로 적대적이다. 현대에 일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런 이유가 있다.
중세에는 고리대금을 금지했는데, 대출에 금리가 붙지 않으면 은행이 발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르네상스 기의 다빈치 전기를 읽다보면, 그가 수도원에 돈을 맡겨 은행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만 해도 일반인에게는 아직 수도원이 은행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당시에 이미 메디치가는 은행업을 겸하는 거상(巨商)이었다.
또 중세에는 상품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주장해서, 일정 가격 이상이나 이하로 상품을 팔 수가 없었다. 이 역시 상업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나아가 길드 조직을 중심으로 일이 행해져서, 기업가나 발명가 등이 나타날 여지가 없었다. 작업의 도구나 장비 등이 모두 길드의 소유였으므로, 길드 조직에 들어가지 못하면 일을 할 수가 없었고, 일단 들어가면 길드의 규율을 따라야 했다. 중세는 그야말로 상업과 경제의 발전에는 암흑의 시기였다.
<무정부는 자유를 낳고 자유는 풍요를 낳는다>
자유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 정부가 작을수록 시민들의 자유는 확장되고, 그 바탕에서 경제가 번영하고 문화가 꽃을 피운다. 그런데 작은 정부에서 나아가 아예 무정부 상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도 있다. 머리 로스바드(Murray Rothbard)가 그렇고 <자유주의 무정부(Libertarian Anarchy: Against the State)>를 쓴 케이시(Gerard Casey)가 또 그러하다. 정부가 없으면 무법의 혼란이 올 거라는 주장에 대해, 무정부주의자들은 법은 국가와 독립적으로 진화할 수 있고, 지금까지 진화해왔다고 응수한다.
케이시는 언어, 법률, 논리, 도덕 등이 모두 자생적인 진화 과정의 산물이고, 어떤 개인이나 국가와 같은 집단의 창조물도 아니므로, 무정부는 혼란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억압되었던 질서를 회복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에스키모족, 초기의 아일랜드 사회, 그리고 현대의 소말리아를 예로 든다. 케이시는 무정부를 국가나 기타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형태의 비자발적 지배의 금지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의 무정부란 절대 무질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자생적인 질서를 뜻한다.
케이시는 국가는 범죄 집단이라고 단언하고, 단지 전체주의 국가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가 억압적이라고 말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미니 국가이고 더구나 일종의 사유재산에 속하는 바티칸 정도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절도, 강도, 납치, 살인 등은 모두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개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국가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절도나 강도라는 것이다. 또 마약 투약자를 투옥하는 경우에는, 피해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구속하므로, 국가에 의한 납치나 불법 구금이다. 징병(徵兵) 역시 마찬가지다. 또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국가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케이시가 든 사례들 말고, 정부의 권력이 작아져서, 또는 무정부 상태에서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꽃피운 사례가 역사에 또 있을까? 하이에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세 후반에 정치적 혼란 덕분에 자본주의가 확산되고 문명이 다시 부활했다. 독일과 유럽 북부 해안지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시 국가과 영국 들은 전사(戰士)가 아닌 부르주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덕분에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 혼란 덕분에 중세 후반에 자본주의가 확산했다고 말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중앙집권이 부재한 상태에서 조그만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융성한 대표적인 예이다.
집단이나 국가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고, 내부의 개인이나 자치 조직들이 경쟁할수록 창의성과 독창성이 개발된다. 고대에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수많은 크고 작은 국가들이 서로 대립 협조하며 병존하던 시기였다. 이때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해서 공자, 노자, 묵자(墨子),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철학자 등 중국의 모든 사상가들이 비 온 뒤 죽순처럼 나타났다. 작은 도성(都城) 중심의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인재를 불러들였고, 사람들은 머리를 짜내고 기량을 발휘해서 새로운 기술과 사상을 만들어내면서, 이 시기는 중국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스도 작은 도시 국가들이 서로 경쟁할 때 탈레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타나 서양 문명에 불을 붙였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 건 서로 경쟁하고 싸우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는 예술가와 철학자들을 길러냈고, 고전 번역을 후원했다. 피치노는 그리스 철학을 다시 복원해냈고,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화가들은 새로운 인간을 화폭과 돌에 재현해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가 넓어졌고, 인쇄기술의 발달로 지식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이 과거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실험이라는 방법으로 자연을 탐구하면서, 중세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유일하게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도 절대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라, 여러 명의 지역 영주들이 경쟁하던 봉건 국가였다. 아마 일본을 한국이나 중국처럼 절대 권력의 왕이 다스렸다면, 일본은 그처럼 일찍 산업화에 나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위의 글은 본인의 미출간 책 <들어라 좌파들아, 이것이 우파의 반론이다>의 글을 재록)
쿠라포브나(Marcia Christoff-Kurapovna)의 글 <자본주의의 요람(Cradles of Capitalism: the City-States of Greece and Italy)>에 따르면, 르네상스의 도시 국가들에서는 귀족이 출생에 한정되고, 사회적 지위는 개인의 재능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래서 역사가 부르크하트는 이런 사회 현상을 “개인의 탄생”이라고 명명했다.
또 인문주의자들은 프란시스코나 스토아 학파의 이상인 “빈곤”을 배격하고, 상업과 부(富)의 추구를 긍정했다. 그래서 인문주의 1 세대라 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브루니와 프란체스코 바르바로(Francesco Barbaro)는 활기찬 시민의 덕성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부(富)를 찬양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난뱅이에서 갑부가 된 프라토 출신의 프란체스코 다티니(Francesco Datini, 1335 – 1410))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
당시 피렌체, 밀라노 등의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중세의 길드 수공업을 탈피하면서 근대적 기업가들이 나타났고, 모직, 소금, 비단, 올리브 기름 등 갖가지 산물이 거래되었다. 분업이 확산되고, 노동자들은 활발하게 이동했으며, 운송 체계가 구비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는 신성한 사유재산, 기업가 정신과 재능에 대한 보상, 상업과 은행업에서의 신용 등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의 자유주의 선전가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일찍이 <정부>라는 글을 통해 신랄하게 정부의 실체를 까발리고 비판했다. 정부에 대해 무비판적인 신뢰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마 좋은 각성제 역할을 할 만한 글이다. 아래는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정부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정부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이 신비한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숙녀라면 나는 그녀가 고통 받는 인류의 모든 악폐(惡弊)가 일소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정부가 일단 일에 착수하기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생각한다.
언론과 광장의 수 백 개의 입에서는 연일 다음과 같은 요구들이 빗발친다.
“노동과 노동자를 조직하라”
“자본의 무례와 독재를 억압하라”
“나라에 철도를 깔아라”
“평원을 관개(灌漑)하라”
“아이들을 양육하라”
“젊은이들을 가르쳐라”
“노인들을 보조하라”
“모든 직업의 수익을 평등화 하라”
“돈을 빌리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자 없이 대출하라”
“세상의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하라”
“예술을 장려하고, 음악가와 화가, 건축가를 양성하라.”
“상업을 제한하고 상인 해군(merchant navy)을 창설하라”
“진실을 발견하고, 우리의 머리 속에 일말의 이성을 주입하라. 정부의 임무는 사람들의 영혼을 계몽하고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강화하고 '영성화(靈性化, spiritualize)하고 신성화 하는 것이다”
이에 정부가 애원하듯이 말한다.
“잠깐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당신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자원이 있어야 하죠. 그래서 새로운 대여섯 가지의 새로운 세금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전혀 과하지 않은 거죠. 아마 사람들은 기꺼이 세금을 납부하려 들 겁니다.”
그러자 신사가 소리치듯 말한다
“그건 안 돼! 자원을 갖고 일을 한다면 누구는 못하겠소? 그건 정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오!”
그러자 둘 사이에는 커다란 혼란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나를 무정하며 매몰찬 철학자, 개인주의자, 천박한 사람, 실제적인 경제학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모든 국민의 입에 채워줄 빵을, 또 그들의 모든 고통을 달래주는 향유를 갖고 있고, 그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그들의 모든 실수를 교정해주고, 그들의 모든 결점을 보완해주고, 선견지명, 신중, 판단력, 지혜, 경험, 질서, 경제, 절제 그리고 행동 따위가 없어도 무사하도록 보장해주는, 그런 호의적이고 지치지 않는 존재인 정부를 발견했다면 축하해드리겠다.
우리의 손아귀에 당신들이 알고 있는 정부처럼, 무궁무진한 부(富)의 원천과 계몽 ---만능 의사, 마르지 않는 보물, 무오류의 조언자 등을 갖고 있다면 다시 없이 좋은 일이다. 사람들은 힘든 일을 피하려 하지만, 만일 노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결핍의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노동도 고통도 모두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기대 사는 것이다. 그러면 일부 사람들에게 모든 고통이 따르고, 일부 사람들은 만족과 쾌락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종속(從屬)와 약탈의 기원이다. 하지만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인간들의 본성 때문에,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약탈할 수는 없다.
압제자는 직접적으로 그들의 희생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폭군은 아직 존재하지만, 희생자들과 폭군 사이에는 정부라는 중개인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부에 호소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소유물을 일부 차지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일이니까, 당신이 좀 추진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나 대신이 법률이 알아서 해줄 테니, 나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거요. 또 약탈과 똑같은 이점이 있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이나 불명예는 없지 않소!”
우리 모두는 정부에 위와 유사한 요청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한쪽에 더 많은 부담을 지우지 않고서는, 다른 쪽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
정부라는 가공(架空)의 존재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갈취해먹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를 거저 얻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숨긴다. 하지만 그걸 해결하는 대상을 생각해냈다. 정부에 호소하면 된다. 모든 사람들은 정부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정부(政府)인 당신은 정당하게 그리고 명예롭게 대중의 돈을 갈취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해서 우리가 나눠 갖도록 해주시오.”
아뿔사, 정부는 이런 악마와 같은 말을 따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정부는 대중의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자신에게도 이익이 돌아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부는 그들의 재산과 영향력을 늘리고 싶어 하는 관료와 장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관장하고 그들의 판관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 내내 이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렇듯 주고 받는 약탈은, 법률에 따라 질서 있게 이뤄졌고 또 상호적이므로, 범죄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정부는 많은 세금을 거둔다. 그러면 자신들에게 많은 몫이 돌아간다. 정부는 관료의 숫자를 증가시키고, 특권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러다 마침내는 재앙에 이르는 정도로 수탈을 하고 만다.
정부가 한 사람에게 특혜를 베풀게 되면, 나라 전체에는 더 커다란 피해를 끼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들의 요구는 정부를 곤란하게 한다. 만일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정부가 나약하고 악의적이며 무능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구를 들어주면 정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해서, 득보다는 실이 크게 한다.
1848년의 프랑스 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프랑스인은 공화국을 구성했고, 이는 프랑스인들을 더 높은 수준의 도덕과 계몽 그리고 복지에 올려놓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글은 주체인 국민과 그에 종속하는 공화국 정부가 위치를 바꾸었다. 국민이 스스로 노력해 도덕과 계몽과 복지를 높여야 하지만, 그것을 정부에게 맡기고 있다.
위의 문장은 “어린이가 어머니를 먹여 키운다.”라는 문장처럼 황당하다. 이에 반해 미국의 헌법을 보면, 그들은 국가로부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자신들과 그들의 힘에 기댈 뿐이다.
나는 정부의 의인화(擬人化)는 과거와 미래 모두에 재앙과 혁명의 원천이 되었고, 또 될 거라고 믿는다. 한쪽에는 정부가, 한쪽에는 국민이 있다. 정부는 국민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야 하고, 국민은 정부에게 온갖 혜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대중은 혜택과 무세(無稅)라는 두 가지 희망을 갖고 있고, 정부는 두 가지 약속을 한다. 즉 많은 혜택과 불과세(不課稅)이다. 희망과 약속이 서로 모순되므로 절대 실현될 수 없다.
실천할 수 없는 수많은 약속을 남발하는 정부와 절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을 품은 대중, 이들 야망가들과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들이 겹치면 모든 혁명의 원인이 되지 않겠는가?
혁명가들은 대중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당국자들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 우리가 저 자리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세금을 면제하고 많은 혜택을 부여하겠다.”
이를 믿은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하지만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대중의 요구가 빗발친다.
“우리에게 직업과 빵과 지원과 여신(與信)과 훈련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달라. 그리고 약속했듯이 세리들의 요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 ”
하지만 새로운 정부 역시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어쩔 줄 모른다. 그리고 실행보다는 약속이 더 쉽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만일 약속이 박애적이라면, 그것은 재정에 유의해야 한다. 또 만일 재정을 소홀히 하면, 그것은 반드시 박애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부란 단지 국민의 단합된 권력이어야만 하고, 시민들 사이의 억압과 상호 약탈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각자가 자신의 사유재산을 지키고, 정의와 안전을 확보하도록 하는 조직이라고 믿는다.
중세의 어둠은 깊었지만 새벽은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담 스미스보다 앞서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경제학을 시작한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에 따라 수련된 학자들로 대부분 스페인 어를 쓰는 후기 스콜라학파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시장에 우호적이었고, 19세기 후반의 한계 효용 학파(marginalists) 유사한 생각을 했다.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배를 타고 세계를 탐험했고,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남미 대륙 등지에 상업과 무역의 기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스페인의 대학에서는 논리학과 자연법이라는 기초 위에 경제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자연법과 이성은 보편적이므로, 그들은 세계가 작동하는 보편적 법칙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사회 질서에서도 규칙성을 발견하려 했고, 거기에 기독교적 정의관을 부여하려 했다.
살라만카(Salamanca)대학은 16세기 스페인에서 스콜라 학문의 집결지였다. 살라만카 대학의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1485-1546)는 정당한 가격은 기독교적 해석과 달리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합의 하에 도달한 가격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다시 말해 수요와 공급의 교차점에서 만난 가격이 정당한 가격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국제 간의 무역에도 통용되므로, 그는 정부가 무역의 가격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비토리아는 많은 학생을 배출해서 경제학이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했는데, 나바로스(Martn de Azpilcueta Navarrus, 1493-1586) 역시 그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합리적 추론을 통해 정부에 의한 물가 책정은 오류라고 주장했다. 상품이 풍부할 때, 정부는 물가 한계선을 둘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상품이 부족할 때, 물가 통제는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또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이상, 공식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상품을 파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화폐의 수량이 구매력을 결정하는데 주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할 때, 화폐의 수량이 적은 나라에서는 상품이나 사람들의 일손을, 화폐의 수량이 많은 곳보다, 적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또 통화가 외국의 통화와 교환하는데 수익을 낸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자연법을 어기는 일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화폐의 첫 번째 목적은 아니지만, 중요한 부차적 사용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발의 목적은 우리의 발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과 교환해서 이익을 얻지 말라는 의미가 아닌 것과 같다. 따라서 외국환 환전소를 폐쇄하는 것은 그 부문을 가난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코바로비아스(Diego de Covarrubias y Leiva, 1512-1577)는 나바로스의 제자인데, 그는 <Variarum, 1554)>이라는 책을 통해 경제적 가치의 근원을 밝혔다. 그는 마치 19세기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관적 가치론을 예견한 듯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핵심적 성질이 아니라, 인간들의 평가에 달려 있다. 비록 그 평가가 어리석다 해도.”라고 주장했다.
포르투갈 코임브라(Coimbra)대학의 몰리나(Lus de Molina, 1535-1601)는 법률, 경제학, 사회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그 역시 상품은 그 고귀함이나 완벽성이 아닌 인간의 효용에 얼마만큼 봉사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가 든 예에 따르면, 쥐는 창조의 위계 질서에 따르면 밀(wheat)보다 ‘고귀’하지만, 인간에게 어떤 효용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쥐는 낮게 평가된다.
또 특정 상품의 사용 가치(use-value)는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의 평가와 구매 가용성(availability)에 따라 변한다. 예를 들어 장식에나 쓰이는 진주는 왜 곡물, 포도주, 고기 또는 말보다 비싼 것일까? 곡물, 포도주 따위는 분명 진주보다 더 유용하고 또 고귀하다. 하지만 몰리나는 가치 평가는 개인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진주의 정당한 가격은, 누군가가 장식품으로서 진주에 가치를 부여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따른다.
다이아몬드와 물의 역설도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더 유용한 물이 왜 다이아몬드보다 저렴한 것일까? 그것은 개인이 다이아몬드에 그만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고, 또 다이아몬드가 희귀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런 가치의 주관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아담 스미스는 후에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두루 여행하고 많은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몰리나는 또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의 상품이 어떤 협잡이나 독점 등의 부정 행위 없이 한 지역에서 일정한 가격에 팔리고 있다면, 그 가격은 그 지역에서 해당 상품의 정당한 가격이다. 만일 정부가 그 가격보다 높게 또는 낮게 상품의 가격을 책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그는 또 소매가가 도매가보다 높은 이유는, 소비자들이 소량을 구입하려 하고, 또 상품의 증분 단위(incremental units)에 대해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상품이 넘치게 되면 가격이 떨어지듯이, 화폐가 많아지면 가격이 오르게 되며, 그에 따라 임금, 소득, 지참금 등도 결국에 오르게 된다고 쓰고 있다. 당시 대부업은 고리대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지만, 그는 자본의 투자를 포함하는 모든 대부에는 금리를 붙이는 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재산이 공동 소유가 되면 사람들이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또 그것을 소진하기 위해 서로 싸우게 된다고 말하고, 재산권이 분할되지 않으면 공익을 증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집단의 강자들이 약자들을 억누르고 모든 자원을 독점하고 소모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재산의 공동 소유제는 관용과 자비를 끝장내게 되므로, 보시(普施)는 공동 재산이 아닌 사유 재산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이 누군가에게 독점권이라는 특혜를 주면, 그것은 소비자들이 가장 저렴한 판매자로부터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도덕법에 따라 그들이 끼친 손해를 상쇄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Llewellyn H. Rockwell Jr의 글 <Free Market Economists: 400 Years Ago> in The Freeman, September, 1995 참고)
맨더빌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 ~ 1733)은 네덜란드 출신의 영국 의사이자 문장가이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1714년 출판한 <벌의 우화: 또는 사적인 악덕, 공공의 혜택(Fable of the Bees: or, Private Vices, Public Benefits)> 덕분이다. 사적인 수익에 대한 욕망이 없으면 경제가 무너지므로, 사악해 보이는 욕망이 오히려 경제를 뒷받침하고 공적인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는 주장이 담긴 우화 형식의 글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 뒤에는 더 심오한 사상이 싹트고 있었는데, 그것은 현대에 와서야 겨우 평가받고 있다.
하이에크는 <의사 버나드 멘드빌( DR Bernard Mandeville)>이란 논문에서 맨더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회의 복잡한 질서 속에서 인간 행동의 결과는 그들이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며, 이기적이건 이타적이건 개인들은 그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동안 타인에게 유용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사전에 예상하거나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 전체의 질서, 나아가 문화는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는 개인들의 노력의 결과이며, 단지 제도, 관습, 규범 등에 인도되어 그런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또한 이들 제도, 관습, 규범 역시 누군가에 의해 창안된 것들이 아니고, 성공한 제도, 관습, 규범이 생존하면서 점차 굳어지게 된 것이다.”
맨더빌은 진홍색 옷감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이 필요한지 언급함으로써, 복잡한 세계가 중앙의 지휘자 없이도 자체의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는 새롭고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는 양털로 직물을 만들려면 디자인, 양털 빗질. 실잣기, 직조, 방직, 불순물 제거(Scour), 염색, 염료 정착(세트), 실을 균일하게 하기(드로잉), 포장, 그리고 이와 먼 듯하지만 관련이 있는 기계 기술자, 백랍 세공인, 화학 기술자 등도 모두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여기에 들어가는 기계와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멀리 해외로 나가야 하는데, 바다의 악조건을 이겨내고, 또 외국의 기후를 견뎌내고, 재료들을 구해오는 노력은 대단하다고 말하고 있다. 리드(Leonard Read)라는 학자가 1958년 <나, 연필(I, Pencil)>이란 글을 발표해서, 한 자루의 연필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정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관련해 일을 하는지 자세히 설명했는데, 맨더빌의 위의 글을 좀 더 자세히 풀어썼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맨더빌이 당시에 얼마나 혁신적인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맨더빌은 현명한 법을 제정해서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가 최소화되는 시스템을 찾고 있었다.
맨더빌은 법률이 한 현명한 법률가의 창안이 아니라, 시행착오 과정의 결과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의 천재성에 또 그의 통찰의 깊이에 공(功)을 돌리지만, 사실은 장구한 시간과 오랜 세대에 걸친 경험 덕분이다. 인간들 모두는 신체적 조건이나 현명함에서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맨더빌은 장구한 시간과 오랜 세대에 걸친 경험 덕분에 거대한 도시를 다스리는 일이 스타킹을 짜는 것만큼 쉽다고 말한다. 그는 질서와 경제, 시민 사회 자체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바탕으로 건설되었고, 전체 상부구조(superstructure)가 인간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상호 서비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당시 존 로크까지도 언어는 창안되었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맨더빌은 언어가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자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고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기서 그가 인위적이라고 말한 것은, 다시 말하면 문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뜻이고, 한 개인이나 정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맨더빌의 이런 사상은 뒤에 오는 데이비드 흄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게 하이에크의 생각이다. 또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인간의 계획은 아니지만, 인간 행동의 결과,”라는 말을 만들어낸 아담 퍼거슨, 나아가 보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 등에게 그의 사상이 전승되었고, 대륙에서는 사비니( Friedrich Carl von Savigny, 1779 ~ 1861)와 헤르더 등에 영향을 끼쳐 진화의 개념을 널리 전파했다. 또 이런 진화의 개념을 생물학에 적용해서 집대성 한 사람이 바로 찰스 다윈이었다. 따라서 맨더빌은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생각에 길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데이비드 흄
17세기 유럽은 합리주의의 시대였다. 데카르트 이후로 유럽의 사상가들은 이성을 과신하고, 이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 토마스 홉스, 대륙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성이란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이었지만, 이제 이성은 명확한 전제로부터 시작해 귀납적 추론을 통해 진리에 이르는 능력을 가리켰다. 그러나 영국에서 베이컨 등에 대항해 에드워드 코크(E. Coke), 헤일(M. Hale) 등의 법학자들에 의해 고전적 사상이 이어져오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반전을 맞는다. 유럽 대륙과 반대로 오히려 반합리주의적 사상이 주도적으로 되는데, 그 단초는 앞에서 언급한 맨더빌이 열었고, 다음으로 데이비드 흄이 철학적 언어로 분명하게 천명했다.
천재적인 흄은 29살의 나이에 발표한 <인간 본성에 대한 논고( 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 훗날 자유주의(liberalism, 본래적 의미의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는 법 철학, 정치 철학을 전개했다.
흄은 도덕 규범의 탄생에 대해서 “이성은 그 자체로는 완전히 무능하고, 도덕 규범은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한 결론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반합리주의적인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했다. 그는 또 “이성은 열정(passion)의 노예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단언했다. 당시 유럽의 합리주의적 풍토에 비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신념들은 천부적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적’이지 않고, 또 인간 이성의 의도적인 창안도 아니며,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인공물(人工物)”이라고 주장했다. 도덕적 신념들은 인류의 실용적인 경험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완만한 역사의 시간 속에서 도덕 규범이 인간의 복지를 증진하는데 기여한 효용이 얼마나 되는지가, 신념들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는 특정한 법적 제도가 발전한 곳에서만 복잡한 문명이 자라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준수하는 규범과 그로 인해 형성된 질서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고 ‘제한된 관용’만을 지니고 있는데, 또 인간은 외부의 사물을 욕망하고 요구하지만, 외부의 사물은 ‘쉽게 변하고’ 또 ‘결핍’의 상황에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을 수 있고, 또 사람들이 자기 몸처럼 타인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정의나 불의라는 것은 생겨날 필요도 없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이기적이고, 이들이 원하는 물건들은 항상 부족하므로, 물건의 분배를 공정히 하려면 ‘정의’가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와 같은 상황에서 정의의 3가지 근본적인 규범이 나타났는데, 그것들은 “소유의 안정성(the stability of possession), 동의에 의한 소유권의 양도(its transference by consent), 약속의 이행(the performance of promises)”이며, 전체 법률 체계는 위와 같은 3가지 규범을 부연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3가지 규범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개인이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사회생활에서 서로 경쟁하고 협조하면서 서서히 그들 사이에 합의가 되고 완성된 규범이다. 즉 3가지 규범이 없으면 사회 생활이 매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 사이에 천천히 위와 같은 규범이 자리 잡았다는 말이다.
나아가 그는 언어 역시 인간들의 소통 과정에서 서서히 만들어졌고, 금과 은이 화폐가 되었으며, 법률, 도덕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보편적인 질서를 세우려면, 반드시 보편적인 정의의 규범이 사회 전체에 적용되어야 하는데, 만일 개인이나 공동체의 특정 목적이나 또는 특정 개인의 가치가 우선하게 되면 규범이 무너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공동체의 특정 목적이나 개인의 가치가 우선되는 사회는 바로 사회주의 사회, 또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흄은 인간은 근시안적이어서, 먼 미래의 소득보다는 가까운 장래의 사소한 이득을 탐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규범으로 그들을 규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흄은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는 법은 있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법률은 개인의 행위와 그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데, 개인의 가치를 보려면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를 논하는 글에서는 시민사회의 완성은 ‘자유’라고 밝혀,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최고의 정치적 선(善)이라 할 수 있는 자유, 평화, 정의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이어서, 외부로부터 오는 상해(傷害)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제도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선성(善性)에 기대어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지켜낼 수는 없고, 그보다는 비록 악당이라도 공익을 위해 행동하는 게 자신에게도 이롭도록 제도를 만들어야만, 자유와 평화와 정의가 확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정치학에서는 “모든 인간은 악당이다”라고 전제해야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은 아니지만, 기묘하게도 정치학에서는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정부의 긍정적인 역할도 부정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리나 성채의 건설, 항구의 개항, 운하의 개통, 육해군의 정비 등이다. (위의 글은 하이에크의 <The Legal and Political Philosophy of David Hume>를 참고했음)
아담 스미스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 쯤 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머리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는 그에 대해 한 무더기 비난을 퍼부었다. 그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는 진실한 이론은 하나도 창조하지 못했고, 그가 창안했던 모든 것은 모두 엉터리였다는 것이다. 또 스미스는 염치없는 표절가여서, 프랑스의 캉티용이나 그의 스승인 프란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등이 이론이나 문장, 아이디어 등을 가져다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시 극단적인 평가일 따름이다. 그보다 우리는 하이에크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좋을 듯 하다. 하이에크는 아담 스미스가 당시 스코틀랜드 사상가들의 한 흐름인 자생적 질서의 옹호자였다고 본다. 그는 당시의 한 평론을 예로 든다.
18세기 당시 <에딘버러 리뷰>의 편집자였던 프랜시스 제프리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 에딘버러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던 아담 퍼거슨, 글래스고 대학의 민법 교수 존 밀러(1735 ~ 1801) 등은 “사회의 역사를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요소들로 추적해 들어가, 그동안 명백히 규정된 제도에 의한 발전이라 믿었던 것들을, 몇 가지 자명한 원칙들의 자생적이고 불가피한 발전이라고 밝혔다. 또 정치적 지혜나 계책이 별로 개재되지 않은 채, 가장 복잡하고 인위적인 정책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분업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논의가 대단한 점은, 면식 있는 사람들의 알려진 구체적인 수요나 능력이 아닌, 시장에서 주고받는 가격이라는 추상적인 표지에 의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거대 사회’라는 방대한 영역에 봉사하고 있는데, 사실 거대 사회는 어떤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도 관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이해의 편벽성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면, 그들은 사람들과 그들의 수요에 봉사하고, 나아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빵을 만들 때, 인간은 자신의 제한된 지식에도 불구하고, 일단 빵을 만드는 기술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즉 빵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때 그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자신만의 비법을 이용해야 많은 빵을 팔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밀가루나, 수입 밀가루 중에 선택해서 빵을 만들 수 있다. 이때 밀가루 가격은 그가 어떤 밀가루를 선택하느냐 하는데 주요한 지표가 된다. 그는 밀가루의 가격에 따라, 또 자신의 빵을 팔고 싶어 하는 고객에 따라, 거기에 적절한 밀가루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한국이나 미국 등의 농부는 그가 알지도 못하는 먼 곳에서 밀을 키우는데, 이는 마치 그가 그들을 부리는 것과 같다. 또 제빵사는 그가 만드는 빵을 누가 사 먹을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가격과 빵의 맛만 맞는다면, 누구든 그의 고객이 될 수 있다.
제빵사가 비록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해도, 맛있고 좋은 빵을 만들기만 한다면, 그는 수많은 고객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또 동시에 그가 알지 못하는 빵과 관련된 재료나 도구와 관련된 근로자들의 노동과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일이, 무슨 대단한 컴퓨터와 같은 지식이나 복잡한 수학 지식이 없이도, 가격이라는 시장의 표지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인간은 30 ~ 150명 정도의 집단을 이루던 대면(對面) 사회의 윤리에 익숙했는데, 그것은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가시적인 선(善)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대 사회가 나타나면서 상인들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고객을 위해, 알지 못하는 먼 지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시장의 가격이라는 지표를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행위를 시작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배치되었다. 과거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할 일이었다. 하지만 거대 사회만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가 있고, 만일 인간이 과거의 대면 사회적 윤리에 따라 소위 말하는 사익(私益)을 제한한다면, 거대 사회는 붕괴하고 커다란 기아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분업을 말할 때 늘 드는 예가 스미스의 핀 공장이다. 아담 스미스는 핀을 만드는 공정은 모두 18 단계인데, 그가 방문한 핀 제조 공장에선 10명의 직공이 기계를 사용해 하루에 48,000 개의 핀을 제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10명의 직공이 각자 18 단계의 공정을 혼자서 하게 되면 고작 10개 내지 20개 정도의 핀 박에는 생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분업과 전문화는 생산성을 높이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스미스는 한편으론 분업을 문명과 경제발전의 견인차로 크게 찬양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사람들의 지적, 도덕적 쇠퇴를 유도할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현했다. 이런 우려는 후에 마르크스에 의해 “소외 문제”로 나타난다.
소위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일반적으로 공익을 증진하려는 의도가 없고, 얼마나 증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외국의 산업보다는 국내 산업의 지원을 선호함으로써,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만을 목표로 한다. 산업의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가 되도록 관리함으로써, 그는 단지 자신의 이득만을 목표로 하지만,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는 자신의 의도에서 벗어난 목적을 증진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사회에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정말 의도했을 때보다 더 효율적으로, 종종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기 때문이다.”
즉 스미스는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그 결과가 사회의 이익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예로 들었듯이, 제빵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매일 맛있는 빵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땅도 사는 등의 활동을 한다. 그런데 그는 빵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맛있는 빵을 제공했고, 또 거기에 들어가는 각종 재료, 밀가루, 계란, 설탕, 버터, 우유 등등, 그리고 그릇, 빵 굽는 가마 등 각종 도구의 생산과 소비에 기여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사회의 이익도 같이 증진된 것이다. 개인이 그의 이익을 위한 활동이 동시에 사회의 공익을 증진하게 된 것이다.
하이에크는 <경제학과 지식>이라는 논문에서 “모든 사회 과학의 핵심 문제는 ‘각자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의 파편들의 조합이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만일 그런 결과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려면 어느 한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전지적) 지식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그런 결과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타나는데, “지식의 분업”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나아가 하이에크는 가격 시스템을 통해서, 분업과 평등하게 분산된 지식의 기반 위에 조정된 자원의 활용이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지식의 파편들을 가진 개인들이 각자의 지식을 활용해, 생활을 영위해 나아가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박사처럼 많은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고, 자신의 생업에 필요한 지식과 시장의 가격을 읽을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이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이에크 당시 사회주의란 단어는 없었지만, 하이에크가 “구성주의(constructivism)"라 부른 그런 사상들이 있었는데, 이는 인간의 모든 제도는 인간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인간에 의해 통제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런 신조의 사람을 ”시스템의 인간“이라 지칭하고 그들을 비판했다. 그는 시스템의 인간들이 거대 사회의 인간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아무런 자기 의견이 없는 물건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하고, 거대 사회라는 장기판에 있는 말들은 각자의 의견이 있는데, 만일 정치가나 관료들의 의견이 이들과 일치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인간 사회는 불행해지고 혼란에 빠질 거라고 경고했다. (하이에크의 글, <Adam Smith: His Message in Today's Language> 참고.)
리차드 캉티용
프랑스의 경제학자 캉티용(Richard Cantillon, 1680 – 1734)은 잊혀진 학자였다. 그의 주저는 <통상 일반의 본질에 대한 논문(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이었고, 그를 재발견한 스탠리 제본스는 그의 경제학을 “경제학의 요람”이라 불렀다.
아일랜드 출신의 캉티용은 프랑스로 건너가 은행업을 하다, 미시시피 컴퍼니 사건의 존 로(John Law)를 알게 되고, 미시시피 컴퍼니에 투자해서 거액을 벌었다. 로는 오늘날의 케인즈주의자와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화폐를 증가시키면 금리가 낮아지고 생산력이 팽창하게 되며, 화폐 증가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가격을 유지한다고 믿었다. 그는 화폐의 유통을 늘리면 생산이 증가한다는 전제에서 생각했고, 저축에 대해 반대했다.
후에 캉티용은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살았는데, 그의 재산을 탐낸 요리사가 하인들과 공모해 그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것이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전기 작가들도 별다른 사실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가 경제학에 끼친 영향을 가름하기는 쉽지 않은데, 데이비드 흄과 아담 스미스, 콩디약, 맬서스, 튀르고, 장바티스트 세이, 중농주의자들 등이 캉티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놀랍게도 경제학의 문을 연 캉티용은 오스트리아 학파처럼 논리-연역적 방법으로 문제를 접근했고, 경제 현상의 인과 관계를 찾으려 했는데, 인과적 관계를 나타낼 때 그는 그것을 “자연스러운(natural)”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또 가치 판단이 개입된 부분에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더 이상 다루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다수의 가난한 국민과 소수의 부자 국민 중에 어느 것이 좋은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의 주제 밖이라며 다루지 않았다.
캉티용은 가격과 시장 가격, 가치와 시장 가치를 구분해서 혼란을 피하고 있다. 시장 가격과 시장 가치는 수요, 공급의 원칙에 의해 시장에서 정해지는 진짜 가격을 말한다. 가격과 가치란 캉티용이 말한 “내적 가치”로, 문제의 특정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된 자원의 기회비용을 가리킨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가치와 가격 이론에서 캉티용의 업적은, 다양한 상품의 가격 또는 가치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규칙이나 공식을 찾지 않고, 대신에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세력과 메커니즘에 집중했다. 또 그의 시장 가격 형성 모델은, 후에 뵘 바베르크의 유명한 마(馬)시장 사례를 앞서고 있다고 한다.
캉티용은 최초로 사고 실험(thought-experiment)이라는 경제적 추론의 방법을 사용했다. 인간 사회는 실험실이 아니므로, 여러 변수를 고정하고 하나의 변수만을 작동해서 그 효과를 알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경제학자는 실험실 대신에 머리 속에서 하는 사고 실험으로 인과 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동일할 경우(ceteris paribus)”라는 가정 하에, 하나의 변수를 변화시켜 그 효과를 추론하는 것이다.
로스바드에 따르면 사고 실험의 원조는 1690년대 프랑스의 지방 판사였던 브와길베르(the sieur de Boisguilbert)였는데, 캉티용은 그의 방법을 응용했다.
캉티용은 먼저 전 세계가 하나의 장원(estate)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영주가 자신의 땅을 다양한 생산자들에게 임대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경제가 지속되려면 생산자들이 서로의 생산물을 서로 교환해야 하고, 화폐와 경쟁, 교역, 가격 체계 등이 있는 자유 시장이 생겨나게 된다.
그는 수요가 기존의 상품 재고와 상호작용을 통해 가격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판매에 나온 상품이나 생산품의 양은, 구매자의 숫자나 수요에 비례해서, 실제 시장 가격이 결정되는 기초이다.”
그리고 수요는 주관적이라서, 각 개인의 기질, 환상, 생활 양식 등에 따라 다르다. 이런 주관적인 가치 평가가 판매에 나온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상품의 가치는 소비자의 가치 평가에 의해 주어진다.
따라서 상품의 제조에 들어간 원가, 노동, 노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이 소비자를 만족시키고, 더구나 비용을 뽑을 만큼 충분하고, 또 다른 상품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상품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모두 폐기 처분되는 것이다.
캉티용에게 시장에서 제시된 가격은 계속해서 생산할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 생산 비용이 시장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제시된 가격이 생산 비용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결정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생산 비용이 8천원에 2천원을 더 붙여, 만 원 짜리 옷을 들고 시장에 나갔는데, 사람들이 비싸다면서 5천원 정도가 적당한 가격이라고 하면, 생산업자는 공장에 가서 생산 비용을 5천원 이하로 낮추고, 거기에 자신의 수익을 보태서, 다시 시장에 갖고 나와야 한다.
생산 비용에 대한 캉티용의 이런 견해는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와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생산 비용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따져 들어가면, 그것은 내적인 것도 또 경제 체제 밖의 미지의 세력으로부터 부여받은 것도 아니다. 생산 비용 자체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 캉티용은 현대 경제학자처럼 기업가를 위험 감수자로 보았고, 그의 수입은 지대(地代)나 임금이 아닌 수익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즉 농부나 독립적인 장인, 상인, 제조업자 등은 기업가로서, 그들은 투입량을 일정한 가격에 구입해서 생산하고, 후에 불확정한 가격으로 팔게 된다. 예를 들면, 농부는 고정 지출이 있지만, 그것으로 만든 생산품의 가격은 날씨와 수요에 따라 달라진다. 리카르도나 후의 왈라스의 경제학에서는 시장에 완벽한 지식이 구비되어 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시장은 확실성으로 가득한 정태적 세계이다. 이에 비해 캉티용은 시장은 불확실성의 세계이고, 기업가는 이 불확실성에 맞서서 투자하고, 수익을 내는 모험가인 것이다.
그는 또 기회 비용(opportunity cost)을 알고 있어서, 지주가 더 많은 말들을 소유하려 하면, 그 대신 곡물의 생산(과 판매)을 중단해야 하고, 또 프랑스가 고급 레이스를 수입하려 한다면, 그들이 생산한 많은 포도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캉티용의 최대의 업적은 그의 화폐 이론에 있는데, 그는 화폐의 기원이 쉽게 상하는 사유재산을 돈으로 바꿔 저축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습에 있다는 존 로크의 설을 반대하고, 또 귀금속의 가치가 사람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로크의 주장에도 반대했다. 캉티용은 또 로크의 소박한 화폐 수량(quantity) 이론 대신에, 화폐의 증가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여러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제본스는 이를 두고 책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의 하나라고 칭찬했다. 이에 비해 로크는 화폐의 수량이 증가하면 가격이 일률적으로 상승한다고 생각했다.
캉티용은 또 화폐의 유통 속도를 결정짓는 요인들도 설명했는데, 이는 영국의 페티(W. Petty)가 처음 제기한 문제로, 캉티용에 따르면 화폐의 유통 속도는 화폐의 수량과 함께 화폐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캉티용은 화폐의 유통 속도에 관해서, “화폐 교환의 속도 증가는 일정 한계까지는 실제적인 화폐 증가와 동일하다”고 보았다. 즉 가격이 화폐 양의 변화에 따라 동일한 비율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유통 속도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강에 흐르는 물이 중간에 강 바닥에서 맴돌면, 비록 수량이 두 배 증가해도 물의 진행 속도가 두 배로 증가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그는 화폐 공급에서의 변화의 형태와, 그 돈이 경제의 어느 부분에 투입되었는지가, 효과를 결정하는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큰 금광이 발견되었을 때, 금광의 소유주와 광부들이 요구하는 상품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 그리고 화폐 공급의 증가는 소비에 새로운 방향을 주어서, 상대적 가격과 유통 속도, 소득의 배분 등에 변화를 준다. 캉티용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국가에서 화폐의 증가는 상응하는 소비의 증가를 부르고, 이는 점차적으로 가격을 인상시킨다. 만일 금은광에서 실제 화폐의 증가가 시작되었다면, 광산의 소유자, 개발업자, 제련소, 정련소, 기타 노동자들은 소득에 비례해 지출을 늘린다. 그들은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게 된다. 그들은 전에는 일이 없던 기계공들에게 일감을 주고 되는데, 그러면 기계공들 역시 지출을 늘린다.
그들에 의해 고기, 포도주, 양모 등의 소비가 증가하면, 광산에서 나오는 부의 혜택을 받지 못한 국가의 나머지 주민들이 차지하는 고기, 포도주, 양모 등의 양은 감소한다. 고기와 포도주 양모 등에 대한 수요가 올라가면 가격이 오르게 된다. 높은 가격에 유도되어 농부들은 더 많은 땅을 임대해 다음 해에도 그것들을 생산하려 한다: 그리고 이들 농부들 역시 가격 인상으로 혜택을 보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의 지출을 늘린다.
그렇게 되면 가격 인상과 소비 증가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첫째로 땅을 임대해 준 토지 소유주들이고, 또 소유주의 하인들이며, 그리고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와 고정 임금 수입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소비에 비례해서 그들의 지출을 줄여야 한다.
위의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캉티용은 화폐의 증가는 맨 먼저 그 화폐를 사용한 사람들이 그들의 기호에 따라 지출을 늘려 가격을 올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로 인해 가격이 인상된 상품을 구입하게 되어서 손해를 본다고 말하고 있다.
한 국가에 유통되는 화폐의 증가는 소비의 증가와 높은 수준의 지출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 화폐에 의한 가격 인상은 화폐의 양에 비례해 모든 생산물과 상품에 균등하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많은 양의 화폐가 한 국가에 유입되었을 때, 그 화폐는 소비에 새로운 방향을 주고, 심지어 유통 속도를 변화시킨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말할 수 없다.
로크와 중상주의자들은 금리가 순전히 화폐적 현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금리는 대여 자금 시장에서 수요 공급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또 새로운 돈의 공급이 증가했을 때 그것이 금리를 낮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고리대금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대했다. 그는 고(高)금리는 높은 위험을 감수한 대가이지, 수탈이나 억압의 결과가 아니라고 보았다.
만일 한 국가에서 증가된 화폐가 대부업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대부업자들의 수를 증가시켜 분명히 금리를 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이 소비하는 사람들의 손에 돈이 들어가면, 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 즉 소비가 증가하면서 이를 눈치 챈 기업가들은 각 부문의 고객들을 노리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돈을 빌릴 필요가 생기는데, 이들 기업가들이 증가하면서 금리가 올라간다.
캉티용은 또 인구 증가의 결정 요인으로 자연 자원, 문화적 요인, 그리고 기술의 수준을 특별히 중요하게 보았다. 그래서 그는 북미가 식민지화 되면, 새로운 농업 기술로 인해 에이커 당 토지에서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캉티용은 고대 문명이 쇠퇴하면서 그들의 인구도 감소해서, 17세기를 거치는 동안 이탈리아 로마의 인구는 2천5맥만에서 6백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는 인구의 수는 당대의 최고의 생산 수준으로 조정된다고 보았다.
캉티용은 국제 간의 화폐 관계에서, 외환 시장의 불균형이 통화량의 변화를 통해 자동적으로 국제적인 통화 균형으로 흐른다는 가격-정화(正貨)-유동 메커니즘(specie-flow-price mechanism)을 처음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그보다 뒤에 나타난 데이빗 흄의 이론으로 알려져 있었다.
약 2백년 동안 유럽의 중상주의자들과 정치인들은 수출을 수입보다 많이 해야 부를 증가시키고 국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만일 A라는 국가가 수출을 수입보다 많이 해서 정화(正貨, specie 즉 금화)의 보유량을 늘리면, 그 나라의 상품 가격이 상승한다. 그리고 이어서 가격 상승으로 인해 그 나라의 상품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되고, 마침내 수입이 수출보다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국제적인 통화 균형이 이뤄지게 된다.
하지만 살러노(Salerno) 교수에 따르면, 캉티용은 경제가 균형을 향해 나가가기 보다는, 끊임없는 불균형의 순환으로 보았다.
안타깝게도 캉티용의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출현 이후에 망각되었고, 그로 인해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이 약 100여 년간 지배하게 되었다. 1870년대의 한계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제학은 잘못된 총계 분석(aggregative analysis), 가치의 생산 비용 이론, 정태적 균형 상태, 인위적인 미세경제와 거시경제의 분할 등의 오류에 빠졌고, 이는 그 이후로도 경제학에 꾸준히 장애가 되고 있다.
중상주의자들은 화폐가 곧바로 부(富)라고 믿었는데, 캉티용은 화폐는 교환의 수단일 뿐이고, 진정한 부는 토지와 노동에 의해 생산된 소비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책의 맨 처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지는 모든 부를 이끌어내는 원천이자 물질이다. 인간의 노동은 그 생산에 형태를 부여하고, 부(富)는 단지 식량, 삶을 편리하게 하는 각종 기기, 삶의 즐거움 등이다.”
그를 발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아담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겼지만, 그의 책이 알려지면서 그는 스미스를 대체하는 경제학자가 되었고, 진정한 경제학의 기초를 놓은 학자가 되었다. (위의 글은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의 글 <Richard Cantillon: The Founding Father of Modern Economics>, Mark Thornton의 글 <Richard Cantillon>, Jonathan M. Finegold Catalan의 글 <Richard Cantillon: Founder of Political Economy>, 하이에크의 글 <Richard Cantillon> 등을 참고했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