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5일 월요일

연합뉴스 한국 가계빚, 우울한 세계 2관왕…GDP 대비 최대·증가 속도 1위 국제금융협회 2분기 37개국 통계…기업부채 증가 속도도 3위 과도한 가계부채, 소비위축 등 경기에 부담…정부 재정건전성은 양호한 편 15일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Global Debt)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으로 세계 37개 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104.2%로 가장 높았다. 이어 홍콩(92.0%), 영국(89.4%), 미국(79.2%), 태국(77.5%), 말레이시아(73.4%), 일본(63.9%), 유로지역(61.5%), 중국(60.5%), 싱가포르(54.3%)가 10위 안에 들었다.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가계 부채 규모가 경제 규모(GDP)를 웃도는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했다. ---------------------------------------------------------------------------------------------- “美 자산버블 대공황 때보다 심해” 커지는 경고 동아일보 “부르는 게 값” 집 내놓자마자 팔려… 인플레 우려 속 자산시장 과열징후 CNN “월가엔 공포는 없고 탐욕만”, 거품 꺼지면 글로벌경제 충격 불가피 --------------------------------------------------------------------------------------------------- 조선일보 光州 자영업자 “이재명 음식점 총량제는 모택동의 참새사냥” ---------------------------------------------------------------------------------------------- [선거조작] 한국을 탈출하라 들탁뇌피 http://www.ilbe.com/view/11378117089 [선거조작] 이재명이 승리하도록 이미 프로그램화 되었다. 한국의 선거는 중국에 의하여 이미 프로그램화 되었다. 한국은 우파진영의 대통령후보는 없다. 누가더 친중파냐? 이것이 중요하다. 좀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누가 더 중국정부에 충성하는지가 중요하다. 한국은 갱단 두목이라도 대통령후보가 될수 있으며 대통령이 될수 있는 나라이다. 이미 현재의 한국정권은 중국의 하수인에 불과한 수준이 되어버렸다. 한국선거는 이미 중국의 손에 달려있다. 선거조작은 중국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다. 물론 한국 정부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한국은 더이상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다. 한국은 중국의 지배를 받는 사회주의 공산국가이다. 출처: https://irvinejournal.com/News/3407 --------------------------------------------------------------------------------------------------- 뜨거워진 강남역에서 마이크 잡았다. 이봉규 티비 https://youtu.be/WUL_wnCG7ZA ------------------------------------------------------------------------------------------------ 트럼프를 히틀러에 비유한 조선의 윤평중, 7시 운동권 전향자들의 실체 스콧 인간과 자유 이야기 https://youtu.be/PMIdxRHgddg ----------------------------------------------------------------------------------------------- 경향신문 로켓엔진 없이 ‘포환 던지기’ 한 방에 우주까지 슝~ ‘원심력’ 이용 신개념 발사장치 미국서 지구 준궤도 진입 성공 기술 높여 저궤도 진입 가능 땐 우주 물자 운송비용 대폭 절감 개발사 “2024년 상용화 목표” 로켓엔진 없이도 우주선을 대기권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신개념 발사 장치가 미국에서 첫 시험 가동에 성공했다. 지상에서 강력한 원심력을 생성하는 특수 설비를 만들어 ‘포환 던지기’처럼 우주선을 공중으로 쏘아올리는 기술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이 기술이 상용화하면 우주로 물자를 옮기는 비용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 서울경제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압박이 갈수록 거세질 수밖에 없다며 결국 ‘택1’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차이나 리스크’를 주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사실상 ‘신(新)냉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전략적 모호성만 유지하려 한다”며 “한국 입장에서는 통상 외에도 국가 안보와 민주주의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미국 편에 서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밝혔다. --------------------------------------------------------------------------------------------------------- 1000년전 고려의 수도 개경의 모습: 한반도 마지막 전성기 북극곰은 http://www.ilbe.com/view/11378146844 고려왕조가 부강했고, 고려의 수도 개경이 번영했던 이유는 수도가 수운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하여, 물자운송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는 상업가(기업가)였던 태조왕건이 세운나라였기에, 실용적인 상인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기에, 상무정신이 강하여 군사력도 강했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들이 국가의 중심사상을 폐쇄적인 성리학으로 삼았기에, 망한 것이다. 창업자의 중심사상과 국호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서해안과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4개수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여 수운이 발달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의 위치> <고려개경의 국제무역항 '벽란도'> <고려개경의 국제무역항 '벽란도'> 벽란도 국제무역항에는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자주 찾아왔고, 중국과 중앙아시아 상인들은 아예 상주하며서 상점을 운영하였다. 게다가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도 와서 교역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벽란도항에서 고려물건(나전칠기보석함, 고려청자 등)들을 구매한뒤 동지중해까지 가져가서 남유럽상인(베네치아 상인)들과 물건을 거래하였다. 남유럽 상인들이 고려물건들을 보고, "이 물건이 어디에서 온것이오?"라고 아라비아 상인에게 물으니 아라비아 상인들이 자신들의 발음으로 고려를 '코레(Coree)' 또는 '코리아(Corea)'라고 불렀고, 우리나라 영어이름이 코리아(Korea)가 된 것이다. <고려시대때 원양항해가 가능했던 '대누선(大樓船)' > 이렇게 수운이 발달했기에 많은 인구가 소비할 수 있는 대규모 재화(식량, 옷감, 생필품)를 개경으로 운송할 수 있었고, 대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곡물 300만석을 저장해 놓은 대의창(大義倉)이라는 거대한 창고가 있었다. 군사 10만명을 키우는데 1년에 넉넉하게 44만석이 필요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의창의 300만석은 약 70만명이 1년 동안 소비할 수 있는 곡식양이었다. 즉 고려왕조가 대의창에 매년 엄청난 양의 곡물(300만석)을 저장해 놓고 이를 개경 인구 50만이 소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개경에 곡물을 이렇게 많이 저장해 놓은 것은 개경에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모든 상업은 잉여물산이 있어야 발전한다. 생산량이 적어서 잉여물산이 없으면, 사람들이 소비하고 남는 물산이 없어서 시장에 팔지 않기 때문에 상업이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시장에 가도 물건이 없으며 국가가 화폐를 발행해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즉 개경의 상업을 지탱하고 보장했던 것이 대의창의 곡물이었다. 개경에 많은 재화(곡식, 옷감, 생필품)가 있다보니, 고려조정에서 화폐를 발행해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개경에서는 화폐가 통하였고 경제가 크게 발전하게 된다. 화폐는 특히 요식업에서 많이 통용되어서, 고려사람들이 화폐를 가지고 찻집에 가서 차를 마셨고, 만두집에 가서 만두도 사먹고, 국수집에 가서 국수를 사먹었으며, 술집에서 술과 안주를 사먹었다고 한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었던 '이규보(李奎報)'의 시를 읽어보면 개경에 화폐경제가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경에는 술집이 많으니 동전 백 닢 쯤 지팡이에 매달고 다니시오." <'이규보(李奎報)'> <개경의 야간술집 '홍등가'> 개경 중심가의 술집들은 낮에 푸른색 깃발을 내걸고 장사를 해서 '청루(靑樓)'라고 불렸다. 반면에 밤에는 붉은 등을 달아서 홍등가라고 하였는데, 홍등가에서 고려 관료들과 귀족들의 잔치가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술은 곡물을 발효시켜 제조한 탁주(막걸리)와 청주를 주로 팔았다고 한다. 안주는 어채(魚菜)를 즐겼다고 한다. <고려시대 대표술: 막걸리> <고려시대 대표안주: 어채-흰살생선, 채소, 해조류, 어패류> 어채는 생선살과 여러 가지 채소에 녹두녹말을 묻혀 끓는 물에 데쳐 만든 음식이다. 개경은 바다와 가까워서 해산물이 풍부했고, 불교문화로 인해 평민들은 해산물-채식을 많이 먹었다. 물론 귀족들은 육식을 하였지만, 가금류(닭, 오리)와 돼지고기만 먹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밭농사를 주로지었던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에서는 메밀냉면에다가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 넣은 음식이 발달했다. <메밀냉면> <고려만두> <고려 잔치국수> 개경에 화폐가 유통되자, 요식업이 발달하였고, 세계최초로 도너츠(개성주악)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개성주악은 찹쌀가루와 밀가루에 막걸리로 반죽하여 도너츠 모양처럼 둥글게 빚어 기름에 튀기고 쌀조청으로 버무린 음식이라고 한다. 서양인들이 19세기 들어서야 도너츠를 먹었다는 것을 볼 때 개성주악은 세계최초의 도너츠라고 할 수 있다. <세계최초의 도너츠 '개성주악'> 이때문에 고려조정은 관료들에게 녹봉으로 곡물(쌀, 잡곡, 콩 등)외에 화폐도 지급하였다. 국가에서 화폐를 발행하면 국가경제가 발전하는 것은 물론 국가재정이 튼튼해진다. 당시 화폐는 구리와 철을 이용하여 동전형태로 만들었기에, 제조비용이 크게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화폐가치는 제조비용보다 높기때문에 국가는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주조차익(화폐가치-화폐발행비용)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지폐가 종이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가치를 갖는다. 이때문에 대한민국은 지폐를 발행함으로써 엄청난 주조차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관료들에게 화폐를 녹봉으로 지급하면 그만큼 곡물을 아낄 수 있어서 남는 곡물을 군사력에 투자할 수 있고, 기근이 들면 창고의 곡물을 구휼미로 쓸 수 있었다. 실제로 고려왕조는 기근이 들었을 때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곡물을 꺼내어 백성들에게 곡물죽과 채소를 무상배급했다고 한다. 위의 구리동전은 일반적인 거래에 쓰이는 화폐였고, 고액거래(집거래 등)를 위해 '은병화' 라는 고액권 화폐또한 발행하였다 (아래사진 참조). <고려의 고액권 화폐 '은병화'> 은병화는 은으로 만들어졌지만, 값비싼 은이 절반만 섞여 있고 저렴한 구리를 절반 섞었다고 한다. 하지만 은병화 1개의 가치는 엄청나게 높았다. 소은병 1개의 가치가 삼베 50필 (약 150만원)이었다고 한다. 결국 고려왕조는 고액권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엄청난 주조차익을 얻었고 그만큼 국가재정이 튼튼해진 것이다. 은병화 100개(1억5천만원)면 개경의 대저택 1채를 살 수 있었다. 당시 개경 평민들의 평균 1년 연봉이 3백만원 이었기에 개경의 대저택 가격은 비싼편이었다. ​ 즉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과 지배층들이 경제적, 상업적 마인드를 가지고 국가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 한양을 비롯한 다른 왕조들의 수도에서 화폐가 통하지 않고 원시적인 물물교환으로 상거래가 이루어진것은 이러한 경제시스템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해서 곡물과 옷감으로 거래를 하게 되면 경제가 크게 발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곡물과 옷감이 많이 손실되고 주조차익을 얻지 못해서 국가재정이 악화된다. 조선왕조의 국가재정이 고려왕조의 5분의 1 정도밖에 안되었던 것은 이때문이다. 결국 조선은 군사력과 국력이 약해져서 대규모 외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국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였다 (도로망, 하천정비사업, 식목사업 등). 고려왕조는 대의창 외에도 개경에 창고가 3개나 더 있었다. 우창, 좌창, 4고 등 3개창고는 국가재정용 창고였다. 우창에 20만석, 4고에 6만석, 좌창에 20만석 등 총 46만석의 곡물을 저장했다고 한다. 우창과 4고의 26만석이 황실운영비였고, 좌창의 20만석은 관료(문신, 무신, 공무원, 군인)들의 녹봉으로 나가는 재정이었다. 고려의 국가재정이 튼튼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고려왕조가 부유하여, 궁궐창고에 금과 비단을 많이 쌓아두고 있었다. 이에 고려왕실은 신료, 장군, 병사들 중 공을 세운 사람에게 금과 비단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고려시대 금장식> <비단>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洪仁桂)와 강계원수(江界元帥) 이억(李薿)이 앞장서 요동(遼東) 땅에 쳐들어가 명나라군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돌아오니 우왕이 기뻐하며 금으로 만든 정아(頂兒)와 무늬 놓은 화려한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고려사(高麗史)-1388년> "우왕은 궁궐 창고의 금과 비단을 내어 군사 수 천여 명을 모아 수도 개경의 방비를 강화했다." <고려사(高麗史)-1388년> 금 1돈(3.75g, 29만원)이면 쌀1가마니(80kg)와 돼지고기 6근을 살 수 있었고, 비단은 1필(3kg)을 주면 쌀을 9가마니(720kg)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 수공예품: 나전칠기> <고려 수공예품: 나전칠기 보석함> <고려도자기: 고려청자> <고려도자기: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화려했지만, 생산량이 많아서 생각보다 귀하지 않았다. 개경시전의 찻집에서도 고려청자를 주로 사용하였다. <개경 시전에는 찻집, 술집, 만두가게, 국수집 등 다양한 요식업이 존재하였고, 음식을 먹은 뒤에는 바둑, 장기 등의 놀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개경은 진기한 물건과 돈이 많았으며,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상인들과 고객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치안유지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고려조정은 시전의 질서와 치안유지를 위해 2가지 행정기구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남대가(시전)의 입구에는 물가와 유통질서를 관리 감독하던 경시서(京市署)와 치안을 유지하던 가구소(街衢所)가 있었다. 이렇게 치안과 상업질서를 유지했기때문에 개경의 상업이 더욱 발전하게 된것이다. ​ 고려라는 나라의 행정력, 경제력, 치안력, 시스템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려의 수도 개경은 개경성(둘레 23km)안 인구만 30만 이었고, 개경 성밖 인구까지 합하면 50만의 소비도시를 형성했다. 인구 50만이면 당시 전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드는 대도시였다. 1. 송나라 수도 '카이펑': 100만~150만 2.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 100만 3. 아바스왕조 수도 '바그다드': 100만 4. 고려 수도 '개경': 50만 그럼 고려의 수도 개경은 어떻게 인구 50만의 초거대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는가? 수운 발달외에 다른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개방성과 유연성이었다. ​ 고려왕조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수도 개경에 누구든 자유롭게 거주하고 집을 살 수 있어서,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붐볐다. 집을 살 수 없었던 가난한 농부들은 초가집을 임대(렌트)하여 살았다고 한다. 개경은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여, 일자리가 많았기에,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주택 임대업이 성하였다. 이때문에 인구가 50만까지 성장한 것이다. 고려왕조는 상업가(기업가)가 세운 나라 답게, 자본주의 성향이 강하여,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었기에 수도 개경이 대도시로 성장하여 번영한 것이다. <고려 개경의 중심가 '남대가(시전) 거리'> 개경의 기와집 한채는 은 10근에서 50근 (4천만원~1억 5천만원)에 신분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개경에서는 신분이 높지 않아도, 상업을 통해 돈을 많이 벌면 지위가 높은 고관대작보다 더 넓고 큰 저택에서 살 수 있었다. 이때문에 고려시대때는 평민(농민)들 중에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고려시대 개경에서 기와집을 살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은 '경제력'이었고, 조선시대 한양에서 기와집을 살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은 '신분'이었다. 고려는 우리민족 왕조 중 가장 자본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고려시대 기와집은 조선시대 기와집보다 크고 화려했으며, 넓은 정원과 연못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푸른빛의 청자기와를 사용하여 더 화려해보였다. 고려시대가 조선시대보다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기와집은 조선시대 기와집보다 화려했다. 정원이 넓고 나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와집에 연못을 파서 잉어를 기르거나,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문에 조선시대 기와집보다 비쌌던 것이다.> 고려의 문신 이규보의 시문집에 의하면,​ "양응재네 집에 놀러 갔었는데, 그의 정원은 사방 40m 크기로 진귀한 나무와 이름있는 과수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귀한 포도나무가 주렁주렁 자라고 있었다." -이규보(李奎報) 포도는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인 작물로서 당시만 해도 귀한작물이었지만 고려시대 부자들은 집 정원에 포도나무까지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경에서 가장 귀한 과일은 감귤과 유자였다고 한다. 포도나무는 개경에서도 자랄 수 있었지만, 감귤나무는 개경의 추운겨울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 더욱이 제주도는 고려 15대국왕 숙종 10년(서기 1105년)에 가서야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전에는 제주도가 '탐라국(耽羅國)'이라는 외국이었고, 감귤은 탐라국이 고려국에 조공으로 감귤을 바칠 때만 맛볼 수 있었기에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 이때문에 제주도(탐라국)뿐만 아니라 날씨가 따뜻했던 대마도, 일본에서도 고려에 감귤과 유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 농민출신 백임지(白任至)의 출세 (서기 1130년~1191년) 백임지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출신의 농부였다. 하지만 무예가 출중하여, 고려황실에게 뽑혀서, 개경으로 상경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왕조가 강력한 중앙군을 보유하기 위해 무예가 출중한 자를 우대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의 처음 개경생활은 쉽지 않았다. 농민출신이었기에 가진 재산이 없었고, 제대로된 벼슬을 받지 못하여, 개경의 초가집에 셋집살이를 하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땔감을 팔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평민들이 주로 살았던 초가집> 하지만 출중한 무예실력으로 고려 19대 황제 명종의 눈에 띄어 '형부시랑'이라는 고위직을 받게 되었다. 출세를 한 그는 개경에 대저택을 사고, 부유하게 살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 셋집살이를 할 때 어려웠던 생활을 기억하게 되는데, 가족들과 함께,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옛주인 노파를 찾아가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 내용이 고려사 기록에 남아있다. "명종조에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을 때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행렬을 꾸리고 일찌기 남의 집 살이 할 때의 옛 주인 노파를 찾아가 사례하니 노파가 탄복하였다." <고려사 열전 백임지전> ​이후 백임지는 대흥 백씨(大興白氏)의 시조가 된다. * 고려시대 김치들 고려시대 대표적인 김치는 배추김치가 아니라 무김치와 오이김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고춧가루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백김치였다. 고추가 없었고, 마늘이 귀했기 때문에 매운맛을 내는 '달래'와 '산초'를 김치에 첨가했다고 한다. <백깍두기> <오이백김치> * 푸석푸석한 찐밥에서 부드러운 쌀밥으로 오늘날 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러운 하얀쌀밥은 고려시대부터 먹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토기나 청동으로 만든 놋쇠솥으로 밥을했기에 푸석푸석한 찐밥만 먹을 수 있었다. 토기와 놋쇠솥이 고열을 버티지 못했기때문이다. 고려시대 들어서야 열에 강한 무쇠솥(철솥)이 발명되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고려시대때 무쇠솥이 발명된 것도 개경에 요식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요식업이 발달하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게 되어, 식품조리기구와 양념들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때 발명된 무쇠솥> <무쇠솥으로 지어진 맛있는 쌀밥> <고려인삼> <고려홍삼> 고려의 후손이었던 개성상인들은 산에서 자생하는 산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인삼재배기술을 개발하였다. 아울러 인삼의 기운을 조절한 홍삼까지 개발하여, 일본, 중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무역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인삼과 홍삼은 중국양자강 이남과 일본남부 등 온대남부(아열대 기후)지역의 풍토병인 '열병'을 치료하는데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홍삼은 인삼을 쪄서 인삼의 기운을 조절한 것으로, 인삼보다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고, 단맛이 강하여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비록 인삼재배기술은 조선후기에 개발되지만(산삼이 고갈되었기에), 홍삼은 송나라 사신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중기에 이미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개성상인들은 고려전기(11세기경)부터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治簿法, 개성부기)이라는 독창적인 복식부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서양의 복식부기보다 200년이 앞선것이었고 오늘날 복식부기원리와 거의 같다고 한다. <개성상인 회계장부> 개성상인들은 수입과 지출을 하나의 장부에 기록하는 복식부기 방식의 회폐장부를 사용함으로써 전체영업 내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체계적인 회계방법이 개발될 정도로 고려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개경의 성곽 모습이다. 외성은 둘레가 23km, 성벽높이 9m(27척), 성벽두께 4m(12척), 낭옥 491칸의 규모였다고 한다. 우리민족이 건설한 성곽중 가장 거대했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의 지휘로 20년(1009년~1029년)동안 인부 30만 4,400여명과 토목기술자 8,450명이 동원되어 건설되었다. 고려왕조의 국력, 경제력, 건축기술의 집합체였다. 외성은 총 25개의 문이 있었는데, 대문 4개, 중문 8개, 작은문 13개였다고 한다. 외성덕분에 중심가인 남대가거리, 그리고 황성 밖의 민가, 전답지역을 도적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저렇게 많은 대문을 관리하는 성곽시스템도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고려황궁을 둘러싼 황성(발어참성)의 둘레는 8.7km 였다. 개경성곽은 외성, 내성, 황성, 궁성 등 4중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려는 우리민족 최초의 황제국이었다. 비록 중국과의 무역거래를 위해, 중원에 사신을 보낼때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고려안에서는 고려황제라고 칭하고, 황제가 될 후계자를 태자(太子)라고 하였으며, 환구단(圜丘壇)을 만들어 황제(천자(天子))의 이름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외왕내제(外王內帝)라고 한다. <고려황제가 거주하던 '만월대'> 한반도 왕조들 중에서 최강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왕조였다. ​ 고려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체적인 힘으로 후삼국을 통일했으며, 개방성과 유연성으로 한반도의 모든 민족을 융합시켰고, 국제무역과 상업이 발달하여, 고려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어이름이 Korea(고려)가 된 것도 이때문이다. ​ 즉, 우리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은 고려(고구려)에 있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 정부에 대한 평가 총정리 [리얼팩트] 이씨조선미화멈춰 http://www.ilbe.com/view/11378154339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선조실록 39권, 선조 26(1593)년 6월 5일 무자 5번째 기사> "귀국의 강한 군대는 본디부터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수(隋)ㆍ당(唐) 때는 어째서 그리 굉장했으며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난에는 어째서 그리 심히 겁을 내었습니까?" <금계일기, 5월 20일자 기록> "지금 조선의 소청을 보면 스스로 군사를 연마하지 않고 중국 군대를 자기 군대로 삼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며, 스스로 군량을 비축하지 않고 중국의 병량을 군량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안일함에 젖어 타인에게 그 노고를 전가하고 자신은 안주한 채 타인을 위험에 빠뜨리니 소국이 대국에게 얻을 수 있는바가 아니며, 屬藩이 天朝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597년 1월 25일 명나라 병부가 조선 사신에게 전해준 공식 회답문의 내용 일부> "소신이 김명원(金命元)과 같이 앉아 있을 때 신들의 갓과 소매를 가리키고 웃으면서 ‘이렇게 하고서 왜적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35권, 선조 26(1593)년 2월 20일 乙巳 2번째기사> "초립을 쓰고 소매가 늘어진 큰 옷을 입어 마치 흰 양떼와 같으며, 나뭇가지와 무딘 칼날이 마치 어린애 장난감 같아서 왜놈이 한번 후려치면 삼대 베듯이 꺾이니, 아, 어리석음이여! 당신[조선]네 군사와 함께 결진(結陣)할 때마다 도리어 우리[명] 군사에겐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상주에 있는 군사들과 어떻게 진영을 합하여 지키고 싸울 수 있겠습니까." <선조실록 39권, 선조 26(1592)년 6월 17일 경자 3번째기사> "내가 중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나의 나이는 국왕보다도 높습니다. 이제 명을 받고 나왔으니, 군정(軍丁) 중에 만일 법을 범하는 자가 생기면 그에 맞는 형벌을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다만 귀국은 일마다 게으르고 느리니, 모름지기 단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양원이 통사에게 이르길, 너희 나라[조선] 사람들은 본래 겁이 많아서 적군만 보면 도망해 흩어지기에 여념이 없다. 후일에도 만일 다시 이렇다면, 내가 직접 그들의 목을 벨 것이다. 이제 만일 성곽을 수축하고 굳게 지킨다면, 전라도 하나는 금성 탕지(金城湯池)의 견고함이 있게 될 것이다."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8일 무술 1번째기사> "이이가 드디어 상소하기를, 옛날 전조[고려]의 공민왕 때에 홍건적의 14만 기병(騎兵)이 얼음이 언 압록강을 건너서 침략해 오자 고려에는 그들을 막아낼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곧바로 송경(松京)으로 쳐들어오자 왕(공민왕)은 안동(安東)으로 피해가서 군사 20만 명을 수합하여 이길 수 있었으니 이때의 병력이 오히려 오늘날의 병력보다도 우수했습니다. 만일 오늘날에 외적의 침략을 받게 된다면 비록 1만 명이 못되는 기병이 온다 하더라도 어느 사람이 감히 막아내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 5월 1일 신해 1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병중에 출사(出仕)하여 숙배(肅拜)하고 이어 사면(辭免)하니, 답하였다. 아조[조선]의 병력(兵力)이 전조[고려]에 못 미치고 있는데 오랫동안 승평(昇平)을 누린 나머지 병정(兵政) 또한 해이된 지 오래이다. 나는 가끔 그것을 생각하고 남몰래 걱정하였으며, 실로 적당한 인재를 얻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군대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니 경은 그 점에 대하여 노력하라." <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1월 22일 병자 2번째기사>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고려(高麗) 현종(顯宗)은 거란(契丹)의 화를 만나 도성이 함락되어 남쪽으로 파천하였지만, 마침내 모든 현인들을 거두어 모아 적분(賊氛)을 숙청하고는 고려조의 훌륭한 덕을 갖춘 군주가 되었습니다. 어찌 한 번 불행한 일을 겪었다고 해서 문득 자신은 덕이 없다고 자책하여 한결같이 물러나려고만 하시면서 세상에 뜻이 없는 사람같이 하십니까... 제발 깊이 생각하소서."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19일 갑오 2번째기사> "전조[고려]에서는 수십 만의 병력을 여러번 동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만의 병력도 모집할 수가 없으니, 이는 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무변(武弁)이 부진한 것은 송(宋)나라의 말기와 같은데, 논의만은 대단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만 앞세우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였다." <선조실록> 33년 8월 30일 경자 세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 때 김종직(金宗直)이 생원으로서 군보(軍保)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모면하려고 하니, 이런 폐단은 막지 않을 수 없다. 전조[고려]에 정세운(鄭世雲)이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할 때 20만 군을 거느렸었다. 우리 나라는 평시라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 많은 숫자를 판출할 수 있겠는가... 오억령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적이 오지 않는 것을 믿지 말고, 나에게 대비가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군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미리 교양(敎養)을 하지 못합니다. 고려 정종(定宗) 때 광군(光軍) 30만을 두어 그후 강감찬(姜邯贊)이 거란(契丹)을 막았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칠 때에도 군사가 20만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28일 계사 2번째기사>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조선]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한줄 요약: 일본한테 털려서 막장이 된 게 아니라 이미 막장이어서 털렸던 것이다. ------------------------------------------------------------------------------------------------------------ 경제학과 해석학 2차대전 후에 경제학은 형식주의적이고 수학적인 신고전주의 종합, 미시경제학을 어우른 왈라스의 평형, 거시경제학을 통합한 케인스의 기하학 등에 의해 점령당했다. 신고전주의적 통합에 의한 경제학의 점령을 돕고 부추긴 것은 밀턴 프리드먼의 1953년 논문 <실증 경제학의 방법론>이다. 프리드먼이 한 일은 10여년 넘게 철학계를 지배한 철학, 즉 논리적 실증주의의 이론을 경제학에 도입한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수학적 경제이론과 수리경제학의 모델은 미제스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거짓되고 황당한 전제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옹호자들은 이론의 예측이 정확하다면 전제나 가정은 문제 될 게 없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에 수리경제학회는 그들의 구호를 “과학은 예측이다”라고 했고, 이것이 프리드먼이 신고전경제학을 옹호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신고전주의 통합 경제학도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도 미래 경제를 예측하는데 실패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해석학적 경제학자는 도널드 맥클로프스키로, 그는 자신의 관점을 “수사학”이라고 부른다.(현재는 여자로 성전환 한 바로 그 학자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은 모두 비엔나에서 성장했다. 생각해보라. 매일 매일 원조 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 헤겔주의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지껄이는 당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의미 없는 철학적 헛소리들을 들으면 마침내는 포퍼나 카르납, 쉴릭 등처럼 이런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나아가 언어에서 정확성과 명징성을 요구하게 되지 않겠는가? Hermeneutical Economics Murray Rothbard Economists like to think of their discipline as the "hardest" of the social sciences, and so it is no surprise that hermeneutics—though having conquered the field of literature and made severe inroads into philosophy, political thought, and history—has yet made very little dent in economics. But the economics discipline has been in a state of methodological confusion for over a decade, and in this crisis situation minority methodologies, now including hermeneutics, have begun to offer their wares in the economics profession; of course, the practitioners down in the trenches only loosely reflect, or indeed have scarcely any interest in, the small number of methodological reflections in the upper stories of the ivory tower. But these seemingly remote philosophical musings do have an important long-run influence on the guiding theories and directions of the discipline. For approximately two decades, Lionel Robbins's justly famous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 was the guiding methodological work of the profession, presenting a watered-down version of the praxeological method of Ludwig von Mises. Robbins had studied at Mises's famous privatseminar at Vienna, and his first edition (1932) stressed economics as a deductive discipline based on the logical implications of the universal facts of human action (for example, that human beings try to achieve goals by using necessarily scarce means). In Robbins's more widely known second edition (1935), the Misesian influence was watered down a bit further, coupled with intimations no bigger than a man's hand of the neo-classical formalism that would hit the profession about the time of World War II. After the war, the older economics was inundated by an emerging formalistic and mathematical neoclassical synthesis, of Walrasian equations covering microeconomics and Keynesian geometry taking care of macro. Aiding and abetting the conquest of economics by the new neo-classical synthesis was the celebrated article by Milton Friedman in 1953, "The Methodology of Positive Economics," which quickly swept the board, sending Robbins's Nature and Significance unceremoniously into the dustbin of history. For three decades, secure and unchallenged, the Friedman article remained virtually the only written portrayal of official methodology for modern economics. It should be noted that, as in the triumph of the Keynesian revolution and many other conquests by various schools of economics, the Friedman article did not win the hearts and minds of economists in the pattern of what we might call the Whig theory of the history of science: by patient refutation of competing or prevailing doctrines. As in the case of the Mises-Hayek business-cycle theory dominant before Keynes's General Theory, the Robbins book was not refuted; it was simply passed over and forgotten. Here the Thomas Kuhn theory of successive paradigms is accurate on the sociology or process of economic thought, deplorable as it might be as a prescription for the development of a science. Too often in philosophy or the social sciences, schools of thought have succeeded each other as whim or fashion, much as one style of ladies' hemlines has succeeded another. Of course, in economics as in other sciences of human action, more sinister forces, such as politics and the drive for power, often deliberately skew the whims of fashion in their own behalf. What Milton Friedman did was to import into economics the doctrine that had dominated philosophy for over a decade, namely logical positivism. Ironically, Friedman imported logical positivism at just about the time when its iron control over the philosophical profession in the United States had already passed its peak. For three decades, we have had to endure the smug insistence on the vital importance of empirical testing of deductions from hypotheses as a justification for the prevalence of econometric models and forecasting, as well as a universal excuse for theory being grounded on admittedly false and wildly unrealistic hypotheses. For neoclassical economic theory clearly rests on absurdly unrealistic assumptions, such as perfect knowledge, the continuing existence of a general equilibrium with no profits, no losses, and no uncertainty, and human action being encompassed by the use of calculus that assumes infinitesimally tiny changes in our perceptions and choices. In short, this formidable apparatus of neoclassical mathematical economic theory and econometric models, all rests, from the Misesian point of view, upon the treacherous quicksand of false and even absurd assumptions. This Austrian charge of falsity and unreality, if noticed at all, was for decades loftily rebutted by pointing to Friedman's article and asserting that falsity of assumptions and premises do not matter, so long as the theory "predicts" properly. In its founding years in the early 1930s, the Econometric Society emblazoned on its escutcheon the motto, "Science is prediction," and this was the essence of the Friedman-derived defense of neoclassical theory. Austrians such as Mises and Hayek replied that the disciplines of human action are not like the physical sciences. In human affairs, there are no laboratories where variables can be controlled and theories tested, while (unlike the physical sciences) there are no quantitative constants in a world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freedom of will, and freedom to adopt values and goals and then to change them. These Austrian contentions were dismissed by neoclassicals as simply posing a greater degree of difficulty in arriving at the human sciences, but not in offering a troublesome difference in kind. The neoclassical synthesis, however, began, in the early 1970s, to lose its power either to understand or to predict what was going on in the economy. The inflationary recession that first appeared dramatically in the 1973—74 contraction put an end to a 35-year period of arrogant and unquestioned hegemony by the Keynesian wing of the neoclassical synthesis. For Keynesian theory and policy rested on the crucial assumption that inflationary recession simply cannot happen. At that point, Friedmanite monetarism came to the fore, but monetarism has now come a cropper after making a rapid series of disastrously wrong predictions from the beginning of the Reagan era until the present. But he who lives by prediction is destined to die by prediction. In addition to these failures of Keynesianism and monetarism, the blunders and errors of econometric forecasting have become too notorious to ignore, and a wealthy and supremely arrogant profession, using ever higher-speed computer models, seems to enjoy less and less ability to forecast even the immediate future. Even governments, despite the assiduous attention and aid of top neoclassical economists and forecasters, seem to have great difficulties in forecasting their own spending, much less their own incomes, let alone the incomes or spending of anyone else. Amid these failures, there has been a chipping away at the neoclassical formalism of Walrasian microeconomics, sometimes by disillusioned leaders operating from within this ruling paradigm. As a result of these problems and failures, the last 10 or 15 years has seen the development of a classic Kuhnian "crisis situation" in the field of economics. As the positivist neoclassical orthodoxy begins to crumble, competing paradigms have emerged. Sparked also by Hayek's receipt of a Nobel Prize in 1974, Austrian or Misesian economics has enjoyed a revival since then, with numerous Austrians teaching in colleges in the United States and Britain. Recently there have even emerged five or six Austrian graduate programs or centers in the United States. In a crisis situation, of course, the bad jostles the good in the new atmosphere of epistemological and substantive diversity. No one ever guaranteed that if a hundred flowers should bloom, that they would all be passing fair. On the left, the nontheory of institutionalism has made a bit of a comeback, jostled by "post-Keynesians" (inspired by Joan Robinson) and "humanistic" neo-Marxists who have substituted a vague adherence to "decentralization" and protection of all animal and vegetable life forms for the rigors of the labor theory of value. Which brings us back to hermeneutics. For in this sort of atmosphere, even the underworld of hermeneutics will vie for its day in the sun. Probably the most prominent hermeneutical economist in the United States is Donald McCloskey, who calls his viewpoint "rhetoric" and whose attack on truth occurs in the name of rhetoric and of the eternal hermeneutical conversation. McCloskey, unfortunately, follows the modern path of rhetoric run hog-wild and divorced from a firm anchor in truth, overlooking the Aristotelian tradition of "noble rhetoric" as the most efficient way of persuading people of correct and true propositions. For Aristotelians, it is only "base" rhetoric that is divorced from true principles. McCloskey is now organizing a center for rhetorical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Iowa, which will organize volumes on rhetoric in a number of diverse disciplines. Much as I deplore hermeneutics, I have a certain amount of sympathy for McCloskey, an economic historian who endured years as a drill instructor and cadre leader in the Friedman-Stigler Chicago school's positivist ranks. McCloskey is reacting against decades of arrogant positivist hegemony, of an alleged "testing" of economic theory that never really takes place, and of lofty statements by positivists that "I do not understand what you mean," when they know darn well what you mean but disagree with it, and who use their narrow criteria of meaning to dismiss your argument. In this way, the positivists for a long while were able to read virtually all important philosophical questions out of court and consign them to the despised departments of religion and belles lettres. In a sense, the rise of hermeneutics is those departments' revenge, retorting to the positivists that if "science" is only the quantitative and the "testable," then we shall swamp you with stuff that is really meaningless. It is more difficult to excuse the path traveled by the major group of hermeneuticians in economics, a cluster of renegade Austrians and ex-Misesians gathered in the Center for Market Processes at George Mason University. The spiritual head of this groupuscule, Don Lavoie, has reached the pinnacle of having his photograph printed in his magazine Market Process talking to the great Gadamer. Lavoie has organized a Society for Interpretive Economics (interpretation is a code word for hermeneutics) to spread the new gospel, and has had the effrontery to deliver a paper entitled "Mises and Gadamer on Theory and History," which, as a colleague of mine has suggested, is the moral equivalent of my writing a paper entitled "Lavoie and Hitler on the Nature of Freedom." It must be noted that nihilism had seeped into current Austrian thought before Lavoie and his colleagues at the Center for Market Processes embraced it with such enthusiasm. It began when Ludwig M. Lachmann, who had been a disciple of Hayek in England in the 1930s and who had written a competent Austrian work entitled Capital and Its Structure in the 1950s, was suddenly converted by the methodology of the English economist George Shackle during the 1960s.20 Since the mid-1970s, Lachmann, teaching part of every year at New York University, has engaged in a crusade to bring the blessings of randomness and abandonment of theory to Austrian economics. When Lavoie and his colleagues discovered Heidegger and Gadamer, Lachmann embraced the new creed at the 1986 first annual (and, if luck is with us, the last annual) conference of the Society of Interpretive Economics at George Mason University. The genuine Misesian creed, however, still flourishes at the Ludwig von Mises Institute at Auburn University and in its publications: The Free Market, the Austrian Economics Newsletter, and the Review of Austrian Economics, which in its first issue included a critique of a quasi-hermeneutical book by two ex-Misesians who claim to have discovered the key to economics in the works of Henri Bergson. One of the main motivations of the ex-Misesian hermeneuticians is that their horror of mathematics, to which they react as to the head of Medusa, leads them to embrace virtually any ally in their struggle against positivism and neoclassical formalism. And so they find that, lo and behold, institutionalists, Marxists, and hermeneuticians have very little use for mathematics either. But before they totally embrace the desperate creed that the enemy of my enemy is necessarily my friend, our Market Process hermeneuticians should be warned that there may be worse things in this world than mathematics or even positivism. And second, that in addition to Nazism or Marxism, one of these things may be hermeneutics. And just as Professor McCloskey's history may serve as a partial mitigation of his embrace of hermeneutics, we may go further back and mitigate the sins of the logical positivists. For, after all, the positivists, much as they may be reluctant to admit it, also did not descend upon us from Mount Olympus. They grew up in old Vienna, and they found themselves in a Germanic world dominated by protohermeneutical creeds such as Hegelianism as well as by the young Heidegger, who was even then making his mark. After reading and listening to dialectics and protohermeneutics day in and day out, after being immersed for years in the gibberish that they were told constituted philosophy, is it any wonder that they—including for our purposes Popper as well as Carnap, Reichenbach, Schlick, et al.—should finally lash out and exclaim that the whole thing was meaningless or that they should cry out for precision and clarity in language? Is it also any wonder that the nascent positivists, like McCloskey a half-century later, should go too far and throw out the philosophic baby with the neo-Hegelian bathwater? This article is adapted from a paper delivered at a conference on recent trends in the social sciences held by the London Academic and Cultural Resources Fund and the Institute of Philosophy of the Jagellonian University of Krakow at Krakow, Poland, in April 1987 and appeared in the Review of Austrian Economics 3 (1989): 4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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