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6일 금요일

1. 노예에의 길로 나아가는 대한민국
 
 
 
작은 일시적인 안전을 얻기 위해 본질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자유도 안전도 얻을 자격이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
 
 
활동적인 정부를 경계하라.... 그들은 언제나 억압적이다..... 시민들을 보살펴 준다는 구실로 시민들로부터 그들의 노동을 빼앗는 정부를 방지할 수 있다면, 시민들은 행복하다. (토마스 제퍼슨)
 
독립을 쟁취한 사람들은 국가의 최종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유가 그 자체로 목적이자 수단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자유가 행복의 비결이며, 용기는 자유의 비결이라고 믿었다. 경험에 따르면 정부의 목적이 자비로울 때,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최고의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은 악한 지도자들이 그들의 자유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자유에 대한 최고의 위협은, 열정과 선의를 지녔지만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계략으로 야금야금 자유를 침범할 때이다. (루이 D. 브란데이스)
 
자유의 역사는 정부 권력의 축소의 역사이지, 확대의 역사가 아니다. (우드로 윌슨)
 
 
 
 
오늘도 한국의 양식 있는 인사들은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 그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뒤척이며,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어두운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끝내 우리가 승리하고, 우리의 문화와 유산을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다. 한국을 위협하는 어둠의 세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해방 이후 남로당에서부터 시작된 직접적인 공산화의 위협이다. 이들 세력은 크고 작은 공안 사건의 피고인들과 최근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은 통진당과 폭력혁명의 신봉자인 이석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한국을 좌경화 시킨 김대중, 노무현 두 좌파 대통령, 종북적인 사상을 지닌 국회의원들, 대학에서 의식화 세례를 받고 이후 사회 각 부문에 침투한 세력들, 그리고 콘서트를 가장한 북한의 찬양, 고무 선동가인 신은미 등도 있다.
이들은 우리의 눈에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 보이고, 또 우파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어서, 우리가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이들에 의한 위협은 막을 수 있고, 방어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 하이에크가 경고했던 좌파적 사상의 범람과 정부에 의한 시민의 관리, 과학주의에 기초한 국가의 통제와 지시, 계획과 조직 그리고 복지 사회를 통한 평등화 시도 등은 우리 사회가 지나치기 쉬운 위협이다. 더구나 복지를 가장한 좌파의 공세는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우파들도 동조하고 있으며,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거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드러나기 때문에 대응하기가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전에 선거 공약의 하나로 경제민주화를 내걸었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이것은 완전한 좌파적 개념이다. 그러니까 보수우파라고 자부하는 박근혜 진영에도 좌파적 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박 대통령이 추구하는 복지도 자유주의적 이념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에서는 실업률을 올리는 최저 임금, 대기업을 압박하는 동반성장위원회, 서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는 각종 세금 인상 등이 대통령의 규제 개혁과 함께 있다. 이는 마치 자동차가 좌우 양쪽의 방향등을 모두 켜고 좌우로 정신없이 운전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또 규제로 먹고사는 공무원들에게 규제를 개혁하자고 하는 것 부터가 좀 코미디스럽다. 대통령이 규제를 암 덩어리요, 단두대에 올려서 한꺼번에 처리하라고 해도 안 통하는 것은, 공무원들이 규제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알고 있어도 기존의 정치 역학 때문에 운신의 여지가 없는 지도 모른다.
 
1990년대에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영감을 얻은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도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였지만, 역사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긴 드라마였다. 역사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고, 세계의 반()자유주의적 세력은 여전히 발호했다. 더구나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는 점점 쇠퇴했고,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좌파들은 여전히 유토피아의 환상과 복지국가의 신기루를 쫓아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좌파적인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 미국을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의 나락으로 빠뜨렸고, 한국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나타나 국민의 30%를 좌파 세력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마르크스는 단지 인간에 잠재해 있던 증오와 질투와 폭력의 유전자가 광란의 굿판을 벌일 수 있도록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인간의 폭력성과 질투는 마르크스라는 핑계를 대고 20세기 대명천지에 튀어나와서, 인간을 때리고, 고문하고, 처형하고, 감금하고, 모욕하는 광란의 잔치를 벌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좌파와 우파의 대결은 평화 대() 폭력, 이성 대 악의 본능, 질서 대 혼돈, 사랑 대 질투의 싸움일수도 있고, 이 싸움은 태고적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한 계속될지도 모를 무섭고 긴 갈등이다.
현재 공산주의는 이제는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말로 불리지 않는다. 그 대신 진보(주의), 사회주의, 사회 정의 운동, 경제 정의 운동, 사회 민주주의, 복지국가, 또는 아예 민주주의라는 말로 불린다. 이제 과거 민주주의 국가들은 다시 한번 자국 내에 감염된 공산주의와 일전을 벌이지 않으면, 과거 공산국가들처럼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정치적으로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코미디언 출신의 베페 그릴로(Beppe Grillo)가 정치권에 돌풍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가 제창한 오성운동(The Five Star Movement)3가지는 국회의원의 수를 반으로 줄이고, 그들의 세비를 삭감하며, 반부패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브로(Elisabeth Braw) 기자와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희망이 없는 블랙홀에 빠져 있다. 우리는 현재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에게 이 모든 문제를 맡길 수 없다. 그들은 딜레탕뜨이고 도둑들이며, 기생충들이다.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나라를 그들이 망쳐놓았다.”
아마 우리나라 국민에게 그의 말을 들려주어도 대부분이 박수를 치며 찬성할 것이다. 현재 복지와 평등이라는 좌파적 프레임에 갇힌 소위 선진국 경제는 망가질대로 망가졌다. 국민들은 이 상황을 탈출하고 싶어 하지만, 용기 있게 복지와 평등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정치가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들은 단지 의회에서 자신들만의 권력 놀음에 빠져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자신들의 특권과 쾌락을 좇아 다닐 뿐이다. 그래서 그릴로라는 코미디언이 그들을 향해 기생충이라고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는데도, 시민들은 그의 말에 열광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국가, 어느 정부도 국민의 복지를 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두 국민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존재해 왔다. 그런데 새삼스레 현대의 국가들이 스스로를 복지국가라고 내세우는 것은, 국민의 복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억압과 통제와 압제를 뜻했다.
가정(苛政)은 맹어호(猛於虎)라는 말은 이미 2,500년 전에 중국의 공자가 한 말이다. 당시 이미 정부의 행정 권력이 시민에게 미칠 때, 그것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시대에는 동해안에 고래가 육지로 밀려와도 어민들은 오히려 밤에 몰래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 관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민들을 동원해 기름을 뽑고, 고기를 해체하는 등 죽도록 사역만 시키고 그 이익을 그들이 몽땅 차지했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한국을 여행한 비숍 여사도 어민들이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을 알기에, 어업에 나서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어, 정부의 권력이 무섭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어민들은 초라한 가난으로써 자신을 정부의 간섭에서 지켜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한인들을 찾은 비숍 여사는 그곳의 한인들이 근면하고 부지런하며, 상당한 부()를 일군 것을 보고 놀란다. 똑같은 한인들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그 차이는 정부의 행정 권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간섭할수록 시민의 삶은 억압을 받고, 정부의 간섭이 줄어들면, 시민들은 삶은 자유와 여유가 넘쳐나게 된다는 것을, 블라디보스톡의 한인들이 증명한 것이다. 즉 정부는 본질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고,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므로, 정부의 간섭은 최소화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허구(The Myth of the Welfare State)>의 저자 더글라스(Jack D. Douglas)는 그의 책에서 국가주의 관료 권력은 결국 사회를 정체하게 만들고, 이는 때로 치솟는 인플레로 인해 크게 악화되는데, 이로 인해 결국 국가 권력은 쇠락한다. 쇠락은 때로 반란, 혁명, 외국에 의한 병탄과 함께 찾아온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조선이라는 유교 관료주의 국가가 사회의 정체로 나라가 쇠락했고, 말기에는 동학란 등이 일어났으며, 결국에는 일본에 의해 병탄되었음을 상기한다면, 그의 지적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고 곰곰이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역시 유교 관료주의 국가였던 청국(淸國) 역시 말년에 태평천국의 난 등을 겪고, 서구 열강의 총칼 앞에 종이 호랑이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은 과연 국가 관료주의로부터 자유로운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만일 대한민국이 국가 관료주의라는 덧에 걸려 있다면, 이 나라의 운명은 19세기 말의 조선과 같은 길을 나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이에크의 책 <노예로의 길>을 다시 한번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중의 여론에 의해 움직이는데, 하이에크는 19세기 후반부터 자유주의가 조소를 받는 현상이 유럽 사회 전반에서 일어났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적 견해가 득세했으며, 결국은 독일에선 나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가,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의 지적을 놓고 볼 때, 현재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사회주의적 생각들의 범람, 부자들을 죄인처럼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무상 급식을 비롯한 각종 평등주의적 선동과 정책 등은 예사롭지가 않다. 이런 흐름의 종착역은 집합주의적 사회 체제이고, 인간의 노예화이며, 대한민국의 파멸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집합주의 시스템의 공통점은 특정한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회의 노동력을 의도적으로 조직한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런 국가는 도덕적 기구로 변신하게 된다. 여기에서 도덕적 국가란 모든 도덕적 문제에 국가의 견해를 강요하는 국가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중소 상인들이 대형 마트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항의하면, 정부는 중소 상인은 약자이고 대형 마트는 강자라는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입각해 대형 마트에 강제 휴일을 명령한다.
이런 사회는 나름의 가치 체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래서 조선 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체계나 북한의 성분(成分)에 의한 전 인민의 분류와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도 그런 비슷한 기준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도덕적으로 승리자이다. 그래서 부자나 재벌이 감히 이들을 함부로 대하면, 사리분별 가릴 것도 없이 언론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들을 성토하게 된다. 농촌 출신은 특례 입학으로 대학을 가기도 하고, 서민들은 나라에서 주는 집도 받을 수가 있다. 부의 재분배를 통한 평등화를 위해, 법이 오용, 남용되고 있다.
하이에크는 이미, “입법 당시에 특정 효과가 예견되면, 그것은 시민들의 도구가 아니라, 입법가들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된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입법가들은 정확히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있다. 원칙은 파괴되고 편법만이 판을 치는 것이다.
좌파들이 시도하는 통제는 경제적 통제이므로 괜찮을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우리의 일상은 사회 활동인 동시에 경제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경제를 통제한다는 말은, 인간의 삶의 모든 부문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던 20세기 초의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베아트리스, 시드니 웹 부부, 소설가 H. D. 웰즈, 극작가 버나드 쇼, 철학자이자 수학자 버트란드 러셀 등은 이런 중대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만일 그들이 사회주의나 파시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인간이 나올 수 밖에 없고, 시민들은 그들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아마 그들은 결코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이에크는 <노예로의 길>에서 시민들이 자유를 버리고 직업의 안전을 택하는 과정을 독일과 영국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이미 1차 대전 이전에, 생활의 모든 부문에서 소득과 지위가 당국자에 의해 할당되고 보장되는 사회였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적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멸했고, 학교와 언론에서는 상업적 기업은 불명예스럽고, 이윤 창조는 부도덕하다고 가르치고 선전했다. 또 백 명의 직원을 고용하면 착취라고 하고, 백 명의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면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풍토가 성행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정부에서 일정 부분의 산업을 보호하면서, 보호 받는 안전한 노동자들과 보호받지 못하는 하층 노동자들이 생겨났고, 이것이 점점 심화되면서 사회적으로 안전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고, 자유를 버리고 안전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라스키 같은 멍청한 정치학자들까지 나왔다.
일정한 부문의 산업을 보호하면,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층민이 된다. 우리의 비정규직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보호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커질수록, 안전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안전한 공무원과 불안정한 민간 기업 직원들의 차이가 커지면서, 점점 자유를 버리고 안전을 택하려는 현상이 사회 곳곳에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이 정치적으로 실현되면, 그것은 곧장 집합주의 사회, 즉 전체주의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히틀러가 나타나기 전의 독일 사회는 이미 사회주의적인 토대가 깔려 있었고, 이런 집합주의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그는 독일 사회를 광기의 전체주의 국가로 몰고갈 수 있었다. 하이에크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나치즘과 파시즘의 추종자들이 그 이전에 이미 사회주의 운동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독일의 나치즘은 사회주의의 한 변형이고, 사회주의와 나치즘은 집합주의라는 자궁에서 나온 쌍둥이었다.
 
 
집합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좌파적 국가에서는 비양심적이고 무자비한 인간들이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데, 하이에크 <노예로의 길>에서 그 이유와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좌파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이며 무자비한 방법으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신선한 자유를 호흡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은 전체주의를 혐오하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좌파들의 계획을 실현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매일매일 반복되는 좌파들의 폭력과 불법 행위는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입으로는 언제나 민주를 외치지만, 스스로는 폭력과 불법을 서슴지 않는다.
두 번째로 집합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좌파들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단일한 견해와 세계관을 지닌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지적으로 수준이 낮고,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사람들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의 추종자들은 대개 학력이 낮은 노동자들, 대학에서 의식화 교육에 세뇌된 덜 떨어진 인간들, 사회의 하층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추종자들은 맹목적이고, 감언이설에 잘 속아 넘어가며,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세 번째로 집합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좌파들은 언제나 적과 아군으로 사람들을 가르고,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키운다. 독일에서는 유대인이 나치 좌파들의 적이었고, 러시아에서는 부농(富農)이 서민들의 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좌파들은 언제나 사회를 가난한 사람과 부자로, 80%의 서민과 20%의 부자로, 99%의 서민과 1%의 특권층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상대를 무찔러야 하는 적으로 삼는다. 누구라도 한국의 좌파들과 5분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가진 자와 기득권에 대한 이들의 증오심에 놀라게 된다.
다음으로, 집합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좌파들은 이론에서는 국제적이지만, 실천에서는 국가주의적(내셔널리즘)이고, 현실에서는 전체주의이다. 그래서 중국과 소련이 우수리 강변에서 서로 총질을 해댔고, 중국이 베트남에서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국경을 넘어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를 보면, 좌파들의 국가주의가 확연히 드러나고 만다.
전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내지만, 폭력과 야만의 행위를 집단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자신은 정당하다고 믿는다.
집합주의자, 전체주의자 그리고 좌파들은 권력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역사상 어느 누구도 휘두른 적이 없는 거대한 권력이다. 그들은 개인의 경제적 부분만 간섭한다고 말하지만, 현대인의 모든 일상은 사실 다 경제적 행위이다. 따라서 집합주의자와 좌파들이 갈구하는 권력은 개인의 사생활까지도 간섭할 수 있는 거대한 권력이다. 이런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경쟁 체제 밖에 없다. 만일 좌파들의 야욕대로 중앙에 권력이 집중되면, 시민들은 그들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집합주의자, 전체주의자 그리고 좌파들은 개인을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결과에 상관 없이 도덕적 원칙이 존재한다. 도둑질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 등이 그것이다. 옆집에 가난한 할머니가 매일 박스를 주워 끼니를 잇고 있다고 해도, 도둑질을 해서 할머니를 돕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짓이다. 결과에 상관 없이 도둑질 하지 마라는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합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도덕에서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 그래서 내가 도둑질 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부자를 죽여서 가난한 노동자를 유익하게 했다면, 그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덕 기준은 전체의 선()”이다. 그것을 위해 집단이 시키면, 그리고 상급자가 시키면, 좌파들은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다.
1970년대에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간첩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활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당시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등의 부자집들을 털었다. 남민전의 관련자들은 약 70 여 명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민족문제연구소장 임준열(임헌영), 국회의원 이재오, 작가 홍세화, 시인 김남주, 국회의원 이학영 등이 있다. 이들은 또 사생활은 공생활에 예속된다는 강령 아래, 남녀가 난잡한 난교를 했다고 한다. 나아가 이들은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숫자는 대략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은 바로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 하는 좌파 도덕의 실행자들이었다. 이것은 단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지금도 좌파들은 조직이 지시하면, 또 전체의 선이라고 믿으면, 살인과 방화, 무고와 위증, 거짓말과 헛소리, 폭력과 야만 행위 어느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행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지적으로 수준이 낮고, 정신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인간들이 집단을 구성하고, 이런 집단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무슨 짓이라도 하는 좌파 집단에서는 가장 악랄하고 폭력적이며 야만스러운 인간들이 늘 정상까지 올라가고 만다. 이는 국회에서까지 폭력을 일삼는 한국의 좌파를 보면 자명해진다.
 
사회주의가 파산한 마당에 난데없이 무슨 하이에크의 책을 들추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10년 영국인으로 유럽의회의 의원이기도 한 대니얼 해난(Daniel Hannan)<새로운 노예로의 길: 미국에 대한 경고의 편지(The New Road to Serfdom: A Letter of Warning to America)>라는 책을 출판해서, 미국인들이 유럽식의 중앙 통제에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당시 총리 고든 브라운이 유럽의 미래상을 밝게 그리자, 지속 가능하지 않은 집합주의적 정책을 펼치는 미래는 어둡다고 질타하기도 했던 그는, 책에서 미국은 자국의 보건 시스템, 보육 시설, 복지 규정, 지구 온난화에 대한 접근, 외교 정책, 연방 구조, 실업율 등을 유럽화 하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해난은 정부 독점으로 인한 폐해의 예로 영국의 의료보험을 지적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일류였고, 영국민의 보건 상황은 크게 개선되었다. 하지만 1948년부터 NHS( National Health Service)라는 건강보험을 국민에게 강요한 이후로, 영국의 의료 상황은 대대적으로 악화되었다. 의사들이 일정한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샐러리맨이 되면서, 그들은 환자를 잘 치료하거나 병을 고치겠다는 동기를 상실했고, 그로 인해 병원은 의료 관료들이 사무를 보는 건물이 되어버렸다.
오진은 흔한 이야기이고,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방치되고 무시되는 환자들도 부지기수이다. 2014년의 한 보고에 따르면 매년 약 4만 명의 환자가 의료진의 소홀한 치료로 죽는다. 또 공짜라는 생각에 병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그렇게 되면 아파서 병원에 가고 싶어도 순서가 오지 않아 집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몇 달, 또는 일 년을 넘기기도 한다. 환자들은 기다리지 못해 외국으로 가서 자비를 들여 치료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부 독점의 의료 보험은 비용이 많이 들어서, 감당할 수 없는 재정 적자를 만들고 만다. 이 적자는 다시 시민들의 혈세로 메우어야 한다. 이것이 국가 독점 의료 보험의 실체이고 현실이다.
그는 두 번째 책 <왜 미국은 유럽을 따라 해서는 안 되는가?(Why America Must Not Follow Europe)>에서 유럽이 취했던 제3의 길은 단지 커져가는 관료주의, 지출의 증가, 과도한 세금, 저성장 그리고 높아가는 실업률만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시와 오바마 좌파 정부에서는 정부 규모를 늘렸고, 기업들을 더욱 규제했으며, 사법기관의 중앙 통제를 강화했고, 과세와 대표의 관계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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