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3일 수요일

문화혁명에 라오셔는 어떻게 죽었나?
 
라오셔(老舍)는 차관(茶馆), 루어투어샹즈 등을 쓴 중국 현대 최고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문화혁명의 광풍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6년 문화혁명이 발발하자, 문화계 인사들은 계급의 적이 되어,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당시 라오셔는 북경시 작가협회의 주석이었지만 그 역시 재난을 피하지는 못했다.
 
823일 그는 홍위병 학생들에게 공자묘(孔庙)로 끌려가 비판을 당하고 얻어맞았다. 홍위병들은 그를 꿇어앉히고 사방에 불을 밝히고 연극 도구를 이용해 때렸다.
 
그의 머리가 터져 피가 흘렀고, 얼굴과 가슴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다 누군가 그를 구해야 한다고 해서, 그는 구출되어 간신히 차에 태워 문학연맹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때 이미 문학연맹에는 수백명의 홍위병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위병들은 그가 라오셔인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작가이고 타도의 대상이라는 것만 알았다. 더구나 그는 미국 유학을 했던 터여서, 미국 제국주의에 물들지 않았던가?
 
홍위병들은 돌아가며 그를 때렸고, 그는 온몸이 상처로 낭자해졌다. 그때 한 여학생이 허리띠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평소 성질이 불같던 라오셔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팻말(계급의 적 등의 글귀를 적은 팻말)을 풀어 그 학생의 머리를 내리쳤다.
 
모택통의 홍위병을 때렸으니 그건 반혁명이라는 엄한 죄를 지은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에 의해 더욱 얻어맞았고, 다음으로 처벌을 위해 파출소로 보내졌다. 한밤중에 그의 가족이 파출소에서 그를 구해왔을 때에는, 그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라오셔는 3살 된 손녀를 불러 안녕이란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그는 그 길로 북경 서북쪽에 있던 태평(太平)이란 호수로 가서, 밤이 될 때까지 정좌한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호수를 걷던 사람들은 물에 떠오른 라오셔의 시체를 발견했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다(士可杀不可辱)는 그의 결론이었다.
 
당시 혁명의 광풍 속에 자살한 사람은 라오셔 외에도 너무너무 많다. 공식적으로 혁명의 피해자를 천 만 명이라고 하는데, 중국인 전체가 피해자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폭력을 가한 사람들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테니까.
 
하여튼 이런 문화혁명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악마이거나 악마의 추종자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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